자비곡(自備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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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의 노력으로 마련된 진휼 곡식.

개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은 17세기의 조선왕조는 국가 재정이 부족하여 지방관이 마련한 곡식을 국가 재정에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은 본래 관용(官用)을 절약해서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역 간의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자비곡을 마련하기도 하였고, 공명첩(空名帖)을 판매해 마련하기도 하였다. 자비곡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부민(富民)을 수탈하여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 정부는 지방관에게 자비곡 확보를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1703년(숙종 30)에는 지방관의 자비곡 마련이 의무 사항으로 되었고(『숙종실록』 30년 9월 10일), 1735년(영조 12)에 다시 한 번 자비곡을 설치하라는 강력한 지시가 각 고을에 하달되었다. 이후 자비곡은 비변사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자비곡은 지방관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국가 관리 곡물인 공곡(公穀)이 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은 흉년을 들었을 때 기민(飢民)에게 무상으로 지급되는 진휼의 재원으로 기능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7세기의 조선은 국가 재정이 부족하여 지방관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곡식을 국가 재정에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가 재정이 어느 정도 확충되자 지방관이 마련한 재원은 주로 진휼사업에 사용하였다. 17세기 중엽 이후 진휼정책이 죽을 지급하는 것에서 곡식을 지급하는 것으로 변함에 따라 진휼 재원 확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곧바로 기민에게 무상으로 지급되었고, 평년에는 비축하여 기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내용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은 본래 관용을 절약해서 마련하는 것이었으나, 자비곡의 많고 적음에 따라 포상을 하게 되자 지방관은 여러 방법으로 곡물을 마련하였다. 창고에 있는 곡식을 전용(轉用)하여 자비곡이라 보고하기도 하였으며, 지역 간의 곡물 가격 차이를 이용해 곡물을 매매하여 자비곡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명첩을 판매해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비곡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부민을 수탈하기도 하고, 향임직(鄕任職)을 판매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흉년 시 진휼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부는 이들 행위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1703년(숙종 29)에는 이제까지 권장 사항이었던 자비곡의 마련이 일종의 의무 사항으로 변하였고, 1735년(영조 11)에 다시 한 번 자비곡을 설치하라는 강력한 지시가 고을마다 내려졌다. 이후 지방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비곡에 대한 상벌 기준을 제정하였다. 18세기 전반 정부에서 각 지역의 지방관에게 해마다 자비곡을 마련할 것을 지시한 이후, 자비곡을 비변사에서 관리하였다. 자비곡은 지방관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곡물이지만 비변사가 관리하게 됨으로써 지방관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국가 관리 곡물인 공곡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국가 보유 곡물의 사용을 허락한 공진(公賑)이 아닌 경우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곡물을 마련하여 진휼사업을 시행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을 비변사의 통제 하에 둔 뒤에는 지방관은 자체적인 진휼사업에 대비하기 위하여 별도의 환곡을 설치해야만 하였다. 혹은 각 고을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비곡을 이용하여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환곡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군현 환곡은 그 액수가 많지 않고 일부 지역에서만 나타났다.

변천

조선후기에 들어서 빈번한 흉년으로 인하여 정부에서는 평균 2년에 1회꼴로 곡물을 무상으로 지급하는 진휼사업을 시행하였다. 무상으로 분급하는 곡물로는 환곡, 공명첩 판매로 확보한 곡물, 부민이 자원해서 바친 원납곡(願納穀),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 등이 있었다. 진휼이 끝난 뒤 정부에서는 진휼을 잘한 지방관을 대체로 7단계로 나누어 포상하였다. 이런 포상은 대개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의 액수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그 액수도 100석 이상으로 하였다가 50석 이상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300석 이상을 마련한 지방관을 대상으로 포상하기도 하였다.

지방관이 마련한 자비곡과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부유한 사람이 흉년 시에 자발적으로 재원을 기부하는 권분(勸分) 혹은 원납(願納)이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1,000석 이상의 곡물을 자비곡으로 마련한 지방관이 여러 지역에 상당히 존재하였다(『정조실록』 16년 6월 20일). 하지만 1794년(정조 18) 이후에는 그 수가 현저히 감소하였다. 이는 진휼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명첩을 발급하거나, 부민을 대상으로 곡물을 모집하던 권분을 금지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영조 연간에 제정된 「부민권분논상별단(富民勸分論賞別單)」에서는 1,000석 이상을 기부하면 실직(實職)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원납은 본래 흉년이 들었을 때에 부민이 자발적으로 돈이나 곡식을 진휼의 재원으로 바치는 것이었지만, 실제 시행할 때에는 관의 강요에 의하여 억지로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정조대에는 권분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권분을 금지하는 규정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조대의 조치는 진휼사업에서 대민 침탈을 금지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비축곡 중심으로 진휼사업을 실시하게 되어, 진휼을 목적으로 설치된 환곡의 감소를 초래했다.

참고문헌

  • 문용식, 「조선 후기 수령자비곡의 설치」, 『조선시대사학보』 9, 1999.
  • 정형지, 「숙종대 진휼 정책의 성격」, 『역사와 현실』 25, 1997.
  • 구완회, 「조선 후기의 수령제 운영과 군현 지배의 성격」,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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