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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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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산진 |
한글표제 | 무산진 |
한자표제 | 茂山鎭 |
상위어 | 관방(關防) |
관련어 | 번호(藩胡), 여진(女眞)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관련 인물 | 남구만(南九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산진(茂山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1년 7월 20일, 『현종실록』 14년 12월 30일, 『숙종실록』 10년 3월 25일, 『숙종실록』 20년 2월 15일 |
조선초기 함경도 두만강 중류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설치한 무산(茂山)의 진.
개설
함경도 두만강 중류 지역에 있던 무산부는 원래 조선초기에는 무산보로서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 소속의 보(堡)로 설치되었다. 1438년(세종 20)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부령 관내의 차유령 일대에 만호진(萬戶鎭)으로 무산보를 설치하였다. 무산보는 1509년(중종 4) 차유령 아래로 이전돼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7세기 전반기에 백두산과 두만강 중류 일대의 여진족이 이동하자 두만강 지역이 오랫동안 비게 되어 국방상에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에 무산진을 1674년 두만강 변의 삼봉평으로 옮기고 1684년(숙종 10) 3월에는 무산을 첨사진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무산부는 이후 빠른 성장세를 보여 인구도 증가하고 그 영역도 최초 삼봉평과 차유령, 노전항 일대에서 1706년(숙종 32)에는 박하천 일대로 확장되었다.
위치 및 용도
무산진은 조선초기 설치 당시에는 부령부 북쪽 18리(약 7.1㎞)에 있는 진보로서 백두산 동남쪽에서 경성(鏡城)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차유령을 방어하는 진이었다. 이후 중종대 차유령 아래로 옮기면서 그 역할도 두만강 변에 여진족이 출몰할 경우 차유령 이북으로 진격하여 적의 중심지까지 추격하는 거점으로 바뀌게 된다. 17세기 후반 무산진은 두만강 변으로 옮기고 도호부로 승격하게 된다. 이 지역은 원래 함경도에서 서북지역에 속하는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 백두산과 개마고원에 걸친 삼수, 갑산과 함께 기후가 한랭하고 수량이 적으며 토질도 기름지지 않아 주민들이 거주하기 어려운 산악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강계―삼수·갑산―육진을 연결하는 지역이며 백두산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중요한 요충이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 북방의 위협이 커지자 무산진의 군사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1438년 만호진으로 설치되었던 무산진은 그 터가 척박하고 여진족 거주지와 멀다는 이유로 1509년 차유령 아래로 이전되고 첨사진으로 승격되었다. 아울러 무산진의 성내에 곽산, 수천, 선천의 국고(國庫)를 두도록 하는 조치도 함께 취해졌다(『문종실록』 1년 7월 20일).
현재 무산이 있는 백두산 아래 지역은 원래 조선에 귀부하였던 여진족인 이른바 번호(藩胡)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7세기 초 건주여진 출신의 누르하치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진의 여러 부락과 번호 부락을 통합하여 요동 지역으로 이주하게 하면서 백두산 및 압록강과 두만강 중상류 일대는 공한지로 남겨졌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1650년(효종 1) 함경감사정세규(鄭世規)가 무산을 거점으로 하고 두만강 변까지 주민들의 거주를 허용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1672년(현종 14) 함경감사남구만(南九萬)은 이 지역에 주민들의 거주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고 함경도 내륙 지역의 진보를 두만강 변으로 옮기고 길주와 갑산의 길을 개척할 것을 주장하였다(『현종실록』 14년 12월 30일). 남구만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1673년에 길주에서 갑산으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무산진의 위치를 두만강 변의 삼봉평으로 옮겨 변방 방어와 주민 관리를 용이하게 하였다. 1684년(숙종 10) 3월에는 무산을 첨사진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숙종실록』 10년 3월 25일). 또한 양영보와 풍산보를 무산 소속으로 이전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무산부사이천근(李天根)의 감독으로 무산읍성이 완성되었으며(『숙종실록』 20년 2월 15일), 양영보와 풍산보에도 석성을 쌓았다.
무산부는 신설 직후부터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이는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에 따른 것으로 부령과 회령 등지의 토지와 주민을 떼어 소속시키고 역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이에 인근 고을의 주민이 이주해옴에 따라 거주지 부족 문제가 나타났다. 최초 무산부의 영역은 읍치인 삼봉평에서 동북쪽으로 회령의 노전항까지 100여 리(약 39㎞), 동쪽으로 부령의 차유령까지 75리(약 29㎞) 정도였으나 급속히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어려워 1706년 박하천 일대에 모인 주민들을 무산부로 소속시키고 방수군으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길림성 임강(臨江) 일대에 파수를 설치하여 국경 침범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형태
무산읍성은 둘레 6,226자(약 1.9㎞)의 석성으로 높이 15자(4.5m)이었다. 동쪽면은 천험의 절벽이며 남문과 북문은 1층의 문루(門樓)가, 서문은 2층의 문루가 있었다. 성안에는 원래 우물이나 내가 없었으므로 동수문(東水門)을 설치하였다. 성의 시설로는 대포 등 화기를 발사할 수 있는 포루(砲樓)와 성 위에 세운 누각인 성랑(城廊) 12곳이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참고문헌
- 『무산부읍지(茂山府邑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여지도서(輿地圖書)』
- 『약천집(藥泉集)』
- 『제승방략(制勝方略)』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서원, 2000.
- 고승희, 「조선후기 함경도 내지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