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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의 진압과 조선 내 청국의 세력 확장을 위해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오장경을 모신 사당.

개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 조정에서 조선 내 일본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파견된 오장경(吳長慶)과 그의 친경군(親慶軍)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납치하고 명성왕후(明聖王后)를 호위하여 고종의 정권 복귀에 협조하였다. 오장경이 1884년(고종 21) 청나라로 돌아간 뒤 병사하자, 고종은 그의 업적을 기려 정무사(靖武祠)를 세우고 제사를 모셨다.

위치 및 용도

정무사는 서울 중구 을지로 7가(현재 서울 메트로 빌딩 동대문 별관)로, 임오군란 때 친경군이 주둔하였던 옛 하도감(下都監) 자리에 세워졌다. 임오군란이 발발한 후 조선에 진주한 오장경은 1884년의 갑신정변 때까지도 주둔하였는데,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고종과 명성왕후가 북묘로 피신하자 원세개(袁世凱)가 고종과 명성왕후를 청나라 군대의 주둔지인 하도감으로 옮겨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정무사에는 오장경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때 오장경의 부하로서 조선에 왔던 오조유(吳兆有)와 갑신정변 때 전몰한 청나라 장병들도 모셨다. 오조유는 임오군란 때 오장경과 함께 왔다가 오장경이 청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아 친경군을 통솔하였으며 1886년(고종 23)에 청으로 돌아갔으며, 1893년(고종 30) 정무사에 배향되었다.

정무사에서는 이들 청나라 장병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며 제사를 모셨다. 제사는 정무사가 준공되었을 때와 오장경의 기일인 5월 21일, 그리고 갑신정변 1주년을 기념하여 올렸으며, 1892년(고종 29)부터는 3월과 9월의 두 번째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도록 정하였다(『고종실록』 29년 10월 26일).

변천 및 현황

정무사는 1880년대까지만 해도 충렬사(忠烈祠), 현절사(顯節祠)와 함께 순조대의 전례대로 치제하게 하였다(『고종실록』 22년 4월 28일).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제향을 폐지하거나 중국과 관련된 사당의 의례가 점차 축소되면서 정무사의 제사도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음력 3월과 9월 두 번째 정일(丁日)에 제사를 모셨으나 1896년(고종 33) 8월 14일 궁내부(宮內府)에서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에 관한 별지를 개록하여 아뢴 바에 따르면 정무사의 제사를 8월 두 번째 정일에만 모시도록 하여 제사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33년 8월 14일]. 또 1908년(융희 2) 7월 23일에는 칙령 제50호로 향사리정(享祀釐正)에 관한 건을 배포하면서 선무사(宣武祠), 계성사(啓聖祠), 사현사(四賢祠) 등과 더불어 제사를 폐지하도록 하였다.

오장경이 임오군란 이후 화교들이 조선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정무사는 화교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청국영사관에서 이의 보존을 원하여, 교섭 끝에 1910년(융희 4) 2월에 그 관할권을 가져갔다. 청국에서는 사당을 보수한 다음 정무사의 명칭을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로 바꾸었다. 이후 오무장공사의 관리는 서울에 있는 화교 단체에서 맡아 하면서 봄가을 2차례에 제사를 모셨다. 1942년에도 중국의 남경 민국정부의 공사대우인 임경우는 사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으며, 주한 화교들을 기리는 위판을 오무장공사에 배향하였다.

1977년 수도권 정비계획 수립에 따라 을지로 7가 일대가 재개발에 들어가자 서울시에서는 정무사를 옮겨줄 것을 화교협회에 건의하였다. 이에 화교협회에서는 1979년 사당 건물을 해체하여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희동에 있는 한성화교중학(漢城華僑中學) 뒷산으로 옮겨지었다. 1982년에는 사당으로 올라가는 출입로 계단을 보수하였고, 1992년에도 사당 건물을 보수하는 등 현재까지 관리에 힘쓰고 있다.

형태

정무사는 삼문(三門)의 솟을대문 정문 안쪽에 정전(正殿)인 사당과 동재(東齋), 비각(碑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내부에는 3개의 신단이 있으며 중앙에는 주향자 오장경 위판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향자 오조유의 위판이, 왼쪽에는 주한 화교의 위판이 모셔져 있다.

동재는 전면 4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갑신정변 때 전몰한 장사들의 위판을 모셨다. 비각은 전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로 현재 비석 3기가 모셔져 있는데, 1885년(고종 22) 4월에 고종의 명으로 사당 창건 과정을 적은 ‘오무장공지거사비(吳武壯公之去思碑)’와 오장경을 따라와 전몰한 병사들을 기리는 비가 있으며, 1942년에 사당 중수 과정을 적은 ‘중수로강오무장공사기(重修盧江吳武壯公祠記)’가 함께 모셔져 있다.

사당의 입구에는 사당을 지키는 문인석 1쌍이 있으며, 정전의 앞에도 문인 석상 1쌍이 세워져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오장경이 조선에 오게 된 것은 임오군란의 발발 때문이었다. 1882년(고종 19) 구식 군대인 훈련도감(訓鍊都監) 군사들이 돌이 섞인 군량미를 지급받자,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면서 반란으로 번져갔다. 훈련도감 군사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 훈련장과 경기감영을 습격하고, 창덕궁과 한양 도처로 몰려가 왕후와 민씨 일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공사관이 불태워지고 관원이 피살당하자 일본은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청나라도 이에 맞서 군대를 파견한 것이었다. 오장경은 이때 청군 3,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당시 정권을 장악하였던 흥선대원군을 청국 천진으로 납치하고 친경군으로 군란을 진압하였다.

임오군란의 진압으로 고종은 오장경을 깊이 신임하였으며 오장경은 친청 인사들을 내세워 조선의 내정에도 깊이 간여하였고, 청나라 상인들을 불러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도록 하였으며 이때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어 청나라 상인들이 공식적으로 화교 사회를 여는 시발점을 만들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의 화교들은 오장경을 한반도 화교 사회를 열게 한 비조로 꼽고 그에 대한 제사를 극진히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 『국조사전(國朝祀典)』
  • 『정무사의궤(靖武祠儀軌)』
  • 『정무사축식(靖武祠祝式)』
  • 『황성신문(皇城新聞)』
  • 박현규, 「서울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의 역사와 현황 고찰」, 『중국사연구』74, 2011.
  • 이영춘, 「조선후기의 사전(祀典)의 재편과 국가제사」, 『한국사연구』1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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