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현사(四賢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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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晉)나라의 동양(董養), 당나라의 하번(何蕃), 송나라의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 등의 태학생(太學生)을 배향한 사당.

개설

중국의 태학생이었던 동양, 하번, 진동, 구양철 등의 신위를 모시고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조선 숙종 연간에 이들의 기개와 절조를 기리고, 성균관(成均館)의 태학생들로 하여금 규범으로 삼도록 하기 위해 사당을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 오래도록 실행하지 못하다가, 영조 때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숭절사(崇節祠)라 불렀으나, 1764년(영조 40)에 사현사로 개칭하였다.

위치 및 용도

도성(都城)의 문묘(文廟) 동쪽에 있었다. 중국의 태학생이었던 네 사람을 배향하고 향사(享祀)하던 사당이다. 이 향사는 정조대에 국가 제사 중 소사(小祀)로 등재되었으며,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의례를 거행하였다.

변천 및 현황

1683년(숙종 9)에 왕이 하번 등 중국 태학생의 기개와 절조에 크게 감동하여 성균관 근처에 사당을 세워 향사하도록 특별히 명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채 짓지 못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에 다시 사당 건립을 논의하였으나, 역시 실행하지 못하였다(『영조실록』 1년 4월 11일). 이후 영조가 등극한 이듬해인 1725년(영조 1) 11월에 비로소 사당을 완공하였다. 숭절사라 이름을 붙이고, 12월에 4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60년(영조 36)에 영조는 성균관에 갔다가 숭절사에 들러 직접 ‘유방아동(流芳我東)’이란 네 글자를 써서 걸었으며, 1764년(영조 40)에는 몸소 ‘사현사(四賢祠)’라는 세 글자를 써서 내려 현판으로 걸도록 하였다. 1802년(순조 2)에는 태학생이었던 진사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에 다시 배향하도록 하였다(『순조실록』 2년 9월 24일).

형태

정당(正堂)은 남향으로 3칸이고, 앞에 삼문(三門)이 있었다. 동쪽에 향청(香廳) 4칸, 서쪽에 협문(夾門)이 있었는데, 협문 밖에는 전사청(典祀廳) 2칸, 집사청(執事廳) 2칸, 고사(庫舍) 1칸, 수복청(守僕廳) 2칸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훼철되어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춘관통고(春官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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