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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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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훈융진 |
한글표제 | 훈융진 |
한자표제 | 訓戎鎭 |
상위어 | 관방(關防) |
관련어 | 성저야인(城底野人), 훈융보(訓戎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순남 |
장소 | 함경북도 경원 |
관련 인물 | 성달생(成達生)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훈융진(訓戎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13년 5월 22일, 『정조실록』 22년 3월 22일, 『성종실록』 22년 7월 13일, 『선조수정실록』 16년 2월 1일 |
함경북도 경원부(慶源府)의 훈융(訓戎)에 설치한 진(鎭).
개설
훈융은 야인의 경계와 가장 가까운 육진의 요충지였다. 육진 중 하나인 경원에 훈융보(訓戎堡)가 설치된 것은 1441년(세종 23)이다. 훈융보는 경원도호부 요해처(要害處) 아홉 곳 중의 하나로, 1464년(세조 10)에 훈융을 첨절제사진(僉節制使鎭)으로 했다.
위치 및 용도
훈융보(訓戎堡)는 토지가 비옥하고 샘물도 있었다. 훈융보로부터 안원보(安原堡)까지는 60리(약 24㎞) 거리였다. 그럼에도 겨울마다 안원보에 입보(入保)했다. 이처럼 먼 거리를 봄·가을로 이사하며 왕래하다 보니 폐단이 생겼다. 이에 1459년(세조 5) 훈융보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사람은 안원보에 입보하지 말도록 했다. 1464년(세조 10) 훈융진의 첨절제사(僉節制使)는 군관 3인을 거느리고 부방(赴防)하도록 했다. 1492년(성종 23) 훈융첨절제사(訓戎僉節制使)는 의흥위(義興衛)의 사용(司勇)에서 임명하도록 했다. 훈융진첨사는 당상을 임명해 보냈다.
변천 및 현황
1737년(영조 13) 당시 훈융진의 강 건너편 후춘(後春)의 들에는 청나라 사람이 많이 와서 집단적으로 살았다. 당시 그 수효는 수천에 이르렀다. 이들은 혹은 도망 온 오랑캐라고 하고 혹은 청나라 내지로부터 이사해 와서 산다고도 했다(『영조실록』 13년 5월 22일). 그래서 1748년(영조 24)에 훈융진 건너편에 이들이 집 짓지 못하게 해달라는 자문을 보내기도 했다. 1793년(정조 17) 당시 진의 형세가 쇠락하여 허술하기가 그지없자, 첨사를 반드시 적임자로 가려 임명하되, 성적의 고과에서 상등을 맞은 자에게는 방어사의 이력을 쳐주기로 했다. 대표적 예가 1798년(정조 22) 훈융진첨사(訓戎鎭僉使)를 역임했던 박류(朴瑬)였다. 그는 성가퀴, 성내 관가 시설, 군기 등을 모두 수리하고, 또 자신의 녹봉을 출연하여 토지를 사서 이 수확을 가지고 진속(鎭屬)들의 봉급을 보충했다. 이에 방어사에 추천되었다(『정조실록』 22년 3월 22일).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1491년(성종 22) 7월 성달생(成達生)은 야인인 올적합(兀狄哈, [우디거]) 8명과 5일을 걸어 훈융진의 강변 산간에 이르렀다. 올적합은 성달생을 결박하고 7명을 시켜 지키도록 했다. 초경(初更)에 해당하는 저녁 7~9시에 올량합(兀良哈, [우량허]) 1명이 오자 성달생이 그를 보고 울었다. 올량합은 ‘우리가 너를 먹인 비용을 보상하겠다.’ 하면서 성달생 등이 입은 옷을 벗겨가지고 가버렸다. 날이 밝자 훈융진첨사가 술을 싣고 와서 올량합과 성달생 등을 압송해온 사람을 접대하고 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성종실록』 22년 7월 13일).
1583년(선조 16) 2월에는 야인이 훈융진을 포위하자 첨사신상절(申尙節)과 온성부사(穩城府使)신립(申砬)이 역전 끝에 적의 목 50여 급을 베고 이어 강 건너까지 추격하여 그들의 부락을 소탕했다(『선조수정실록』 16년 2월 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