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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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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청시종묘의 |
한글표제 | 청시종묘의 |
한자표제 | 請諡宗廟儀 |
관련어 | 대행왕(大行王), 시호(諡號), 책보(冊寶) |
분야 | 왕실/왕실의례/길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욱 |
시행시기 | 세종~고종 |
시행장소 | 종묘(宗廟)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청시종묘의(請諡宗廟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4년 8월 19일 |
승하한 대행왕(大行王)에게 시호(諡號)를 올리기에 앞서 종묘에 아뢰는 의식.
개설
시호는 죽은 이의 자취를 살펴서 붙여주는 이름이다. 이처럼 사후에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것은 고인의 삶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그 공적을 후세에 드러내고 잘못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왕에 대한 시호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명 또는 청의 황제로부터 받는 시호이다. 또 하나는 후계왕[嗣王]이 올리는 시호이다. 대행왕은 왕이 죽은 뒤 시호를 올리기 전까지 지칭하던 용어이다. 청시종묘의는 후자의 시호를 대행왕에게 올리기 전에 거행하는 의식이다. 시호를 정하고 책보(冊寶)를 제작한 후 이를 가지고 종묘에 나아가 선왕에게 아뢴 후 관(棺)을 모셔둔 빈전(殯殿)에 있는 대행왕에게 책보를 올렸다.
연원 및 변천
시호의 제도는 중국 고대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시호를 받는 대상은 천자, 제후 등 작위가 있는 자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시호를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하는 군주로부터 시호를 받고, 제후는 천자에게서 시호를 받았다. 천자가 붕어했을 때에는 남교(南郊)에 나아가 하늘에 의탁하여 시호를 올렸다. 조선시대 국왕이 사망하면 중국의 황제에게 상을 알리면서 대행왕의 시호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사왕(嗣王)의 이름으로 시호를 올렸는데 이때에 먼저 종묘에 고한 후에 빈전에 나아가 시호를 올렸다. 이렇게 국왕에게 시호를 올리면서 종묘에 먼저 고하는 것은 전례(前例)가 없으며 조선에서 만든 변례(變禮)였다. 중국의 경우 황후에게 시호를 올릴 때에 남교 대신 종묘에 고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1422년(세종 4) 태종의 국장 때 허조(許稠)의 건의로 인하여 처음으로 거행하였다(『세종실록』 4년 8월 19일).
절차 및 내용
청시종묘의는 대행왕의 시호와 묘호를 정한 후 책보의 제작이 끝나면 이를 종묘에 가져가서 선왕에게 먼저 아뢰고 보여주는 의식이다. 이때에는 영의정(領議政)이 완성된 책보를 가지고 종묘로 가서 먼저 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를 행한다. 이때 올리는 찬품은 매월 종묘와 문묘(文廟) 등에서 지내는 삭망제(朔望祭)와 동일하였으며 희생은 없고 폐백만 준비하여 바치고, 이어 술을 드리는 작헌례(爵獻禮)를 올리고 축문을 읽은 후 마친다. 전폐례를 마치면 책보를 받들고 조계로 올라가 전(殿) 가운데 준비된 책상에 둔다. 봉책관(奉冊官)이 이를 열어 펼치면 독책관(讀冊官)이 북향하고 꿇어앉아 시책과 시보를 읽는다. 이렇게 청시종묘의 의식을 마치면 책보를 받들고 나아가 채여(彩輿)에 안치하고 빈전으로 나아가 시책보(諡冊寶)를 올렸다. 시호를 올리면 대행왕의 이름이 새로 정해진 것이므로 여태까지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으로 표기된 명정을 다시 고쳐 쓰는데 이를 개명정(改銘旌)이라 하였다. 차후 명으로부터 시호가 오면 다시 대행왕의 명호는 더하여져 신주나 축문에 반영된다. 그러나 조선후기 청에게서 받은 시호를 신주와 축문에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묘에 아뢰고 올린 시호가 더욱더 중요시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