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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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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개복신초례 |
한글표제 | 개복신초례 |
한자표제 | 開福神醮禮 |
상위어 | 왕실출산(王室出産) |
동의어 | 개복신초(開福神醮) |
관련어 | 개복신초헌관(開福神醮獻官), 권초제(捲草祭), 소격전(昭格殿) |
분야 | 왕실/왕실문화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지영 |
시행시기 | 조선전기 |
시행기관 | 소격서 |
시행장소 | 소격전(昭格殿), 궁궐 뜰[宮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7년 5월 8일 |
조선시대 전기에 새로 태어난 왕실 자녀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도교 의례.
개설
헌관(獻官)이 도교의 신들을 모신 소격전(昭格殿)에서 사흘 동안 신생아의 복을 구한 다음, 궁궐의 산실(産室) 근처에 가서 다시 한 번 제를 올리는 의례이다. 헌관은 특별히 복이 많은 대신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하였다. 소격전이 존재했던 선조 이전까지만 왕실에서 행하였고, 그 이후에는 권초제(捲草祭)로 바뀌었다.
연원 및 변천
개복신초례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권63 지(志) 권제17 길례소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우왕이 1380년(우왕 6) 8월 궁궐 뜰[宮庭]에서 개복신초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개복신초례를 행한 것으로 보이나,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시대 왕실의 개복신초례와 관련된 실록기사는 태조대부터 성종대까지 모두 7건이 등장한다. 조선전기의 학자 성현은 1494년(성종 25) 왕세자빈 신씨가 원손을 낳았을 때, 원손을 위한 개복신초례의 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그의 저서인 『용재총화』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여기 등장하는 초제(醮祭)가 바로 개복신초례이다. 조선시대 전기에 왕실에서 행해졌으나, 조선이 점차 유교화되어 감에 따라 그 위상이 격하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더욱이 도교의 신전인 소격전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면서 개복신초례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새로 태어난 왕실 자녀의 복을 구하는 의례 행위는 조선시대 후기에 권초제라는 새로운 의례 형식을 통해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개복신초례는 새로 태어난 왕실자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례이기 때문에 의례를 주관하는 헌관 또한 특별히 복이 많은 인물로 선정하였다. 개복신초례의 헌관은 정2품 이상의 대신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하였는데, 자식을 많이 두고 재앙이 없어야[多子無災]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과 함께 조선전기 개복신초례의 헌관이 되었던 인물들은 모두 공신에 책록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권희(權僖),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김사형(金士衡),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남재(南在), 우의정이원(李原), 영의정부사이직(李稷), 우의정윤자운(尹子雲) 등이 개복신초례의 헌관으로 임명되었다.
개복신초례를 행하는 장소로는 국가와 왕실을 위한 도교의례를 전문적으로 행하던 의례공간인 소격전과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인 궁궐이 모두 이용되었다. 개복신초례는 기본적으로 소격전에서 사흘 동안 신생아의 의복을 놓고 복을 구하는 의례가 중심이 되었다. 세종대의 사례에 의하면, 개복신초례의 장소로 소격전(『세종실록』즉위년 9월 25일, 『세종실록』 7년 5월 8일)과 궁궐 뜰[『세종실록』2년 1월 13일]이 각각 등장한다. 이는 개복신초례가 소격전에서 시작하여 산실 근처에서 의례를 마무리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 성현(成俔)은 성종 대에 원손이 탄생했을 때 개복신초례의 헌관으로 임명되었다. 성현은 소격전에서 직접 초례를 주관한 경험을 저서인 『용재총화』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따라서 성현의 눈을 통해 소격전에서 행해진 개복신초례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개복신초례는 사흘 동안 소격전에서 설행되었다. 헌관은 왕실 의복을 담당하는 상의원(尙衣院)에서 정성스레 바친 신생아의 의복을 노군(老君), 즉 노자(老子) 앞에 펼쳐 놓고 새로 태어난 왕실 자녀의 복을 구하였다. 이때 개복신 초례를 행할 헌관과 서원(署員)은 흰옷에 검은 두건을 착용하고, 관을 쓰고 홀을 들고서 재초(齋醮)의식을 행하였다. 제사 음식으로는 과실, 인절미, 차, 과자, 술, 탕 등이 차려졌으며, 그 앞에서 분향하고 절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헌관과 서원 이외에 도사들은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검은 옷을 입었다. 도사 두 사람이 도경을 읽고 신생아를 위한 축사를 푸른 종이에 써서 이를 태우는 역할을 하였다. 소격전에서 사흘 동안의 의식이 끝나는 날, 즉 왕실 자녀가 탄생한지 7일째 되는 날 저녁에 헌관이 신생아의 의복을 궁궐 안으로 가져가 탁상 앞에 다시 진열하고 향불을 피워 재배(再拜)한 뒤 그 의복을 나인이 받아서 내전으로 들여감으로써 의례는 마무리된다. 헌관은 또한 출산 후 문에 걸어 두었던 새끼줄을 걷어서 특별히 준비한 함에 넣은 뒤 해당 관서인 내자시나 내섬시 관원에게 전달하여 창고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도교의 신들에게 아들을 기원하거나 신생아의 복을 구하는 행위는 왕실에서만 행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16세기의 인물인 이문건(李文楗) 또한 손자의 출생을 전후하여 도교의 신들에게 여러 차례 초제를 지냈다.
참고문헌
- 『高麗史』
- 『慵齋叢話』
- 『東文選』
- 『養兒錄』
- 김지영, 「조선시대 왕실 ‘권초례(捲草禮)의 변화」, 『민속학연구』제30호, 2012.
- 김철웅, 「조선초의 도교와 초례(醮禮)」, 『한국사상사학』 제19집, 2002.
- 이희재, 「초례(醮禮)의 종교적 의미」, 『종교교육학연구』 제12권,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