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개시(義州開市)"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9일 (토) 22:36 기준 최신판



선조대 이후 의주 중강 지역에서 시행되었던 개시무역.

개설

개시는 조선후기 청나라나 일본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 시장을 말한다. 함경도 의주에서 열린 의주개시는 중강개시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1592년(선조 26) 국내에 기근이 들자 상신 유성룡이 요동에 자문(咨文)을 보내 압록강 유역의 중강(中江)에서 시장을 열어 교역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중강개시가 열렸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면포 1필 값이 피곡(皮糓)으로는 1두도 되지 않았는데, 중강에서 팔면 쌀 20여 두를 얻게 되고, 은·구리[銅]·무쇠[水鐵]로 교역할 경우 열 배의 이익을 얻게 되어 요동의 미곡이 중강개시를 통해 우리나라에 많이 유입되었다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의주는 서울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제1대로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 개성, 평양과 함께 서북변 방어체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략 기지로 인식되었다. 또 평안도와 함경도 북단에 위치한 산골 벽지와도 통하여 토산물이 모이는 교역 창구로서도 기능하였다. 그러나 중강개시를 비롯하여 중국과의 개시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났다.

우선 중국에서 파삼(把蔘)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은을 받고 파삼을 제조하여 파는 우리나라 상인들이 교역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고 파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인들이 몰래 강을 건너 중국 사람들과 파삼을 교환하기로 약속하고 계약서를 만들어 그 값을 먼저 은으로 받는데, 파삼을 지급할 때가 되어서는 중국 사람이 원래 정한 숫자 중에서 반을 받고 나머지 반은 일부러 받지 않은 채 이자만 취하여 이 때문에 우리나라 상인들 다수가 파산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또 상인들 중에는 우리나라의 긴요한 일을 누설하여 조정에서 이를 근심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9월 7일). 중강개시는 광해군대까지 혁파와 복구를 반복하다가 1646년(인조 24)에 청나라에서 자문을 보낸 것을 계기로 다시 설치하고, 3월, 9월 각 15일에 교역하도록 정하였다가 다시 2월, 8월로 개정하였다.

절차 및 내용

중강개시가 열리기 전 의주와 개성, 그리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영에서 농우, 소금, 종이 등을 각 고을에 나눠 할당하고, 별장(別將)을 따로 정하여 의주에 모이게 한 후 기일이 되면 임시로 파견된 관원인 차사원(差使員)이 통역을 담당할 역학훈도(譯學訓導)와 함께 중강에 거느리고 가서 청 측의 봉성통관(鳳城通官)과 값을 정하여 서로 교환하게 하였다. 이때 의주부윤은 사사로이 판매하는 자를 금단하고 암말[牝馬], 인삼 등은 일절 교역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하였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중강개시에서 공적으로 매매되는 물화의 총수는, 소 200마리, 다시마[海帶] 15,795근, 해삼 2,200근, 면포 모두 373필, 포(布) 175필, 백지 8,400권, 장지(壯紙) 600권, 소금 모두 310석, 보습[犂口] 194개(箇), 사기(沙器) 330죽(竹) 정도였다고 한다.

물화를 교환하는 값은 전부 은(銀)으로 받되 만주에서 생산되는 옷감인 소청포(小靑布)를 대신 받을 경우 1필당 은 3돈 5푼에 준하여 받도록 하였다. 다만 소청포는 짧고 좁아서 쓸 데가 없는데도 우리의 토산 현물을 가져다가 무용한 물종과 교역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상호 자유롭게 물품을 교류하는 호시(互市)라고 하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교역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청과의 무역은 17세기 이후 공무역(公貿易)에 해당하는 개시무역뿐 아니라 사상(私商)이 참여하는 후시무역까지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유승주,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박평식, 「宣祖朝의 對明 人蔘貿易과 人蔘商人」, 『歷史敎育』108, 역사교육연구회,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