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역(公貿易)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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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공무역 |
한글표제 | 공무역 |
한자표제 | 公貿易 |
관련어 | 사무역(私貿易), 사행(使行), 조공(朝貢), 개시(開市), 역관(譯官) |
분야 | 경제/무역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철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공무역(公貿易) |
조선시대 국가와 국가 간에 행해진 공식적인 무역.
개설
조선시대에는 다른 나라에 사행을 갈 때 의례적인 예물로 토산물을 보냈는데 상대국에서는 그 답례로 자기 나라의 특산품을 보내주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공무역은 주로 이와 같이 사행의 왕래를 통해 전개되었다. 공무역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조공무역이었다. 그러나 사행에 편승하여 각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 경우도 넓은 의미에서 공무역에 포함된다. 조선시대 공무역은 크게 중국과의 공무역과 일본과의 공무역으로 구분된다.
내용 및 특징
중국과의 공무역은 주로 조선의 조공(朝貢)과 명·청의 회사(回賜), 즉 조선이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 조공한 것에 대한 답례로 중국 측에서 물건을 보내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조공무역과 관아의 필요한 물품 구입이 주가 되는 무역이 있었다.
조선의 중국 사행단은 북경의 동평관에서 명나라의 조선 사행단은 서울 남대문 안 태평관에서 유숙하며 무역을 했다. 그러므로 이때의 무역활동을 각각 동평관무역, 태평관무역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 공무역은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조선과 명나라의 조공무역과 공무역은 1430년(세종 12) 조선이 명나라에 바치던 금은의 세공 면제 조치를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
조선은 주로 금은으로 만든 그릇, 흰 명주, 각색 모시, 표범가죽, 흰 종이, 인삼 등을 조공품으로 보냈고 명은 그에 대한 답례로 상사(賞賜) 혹은 선물을 하사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비단, 자기, 약재, 예복, 서적, 악기, 보석, 문방구 등을 조선에 보냈다.
일본과의 공무역은 사행무역과 관청 수요를 위한 공무역으로 구성된다. 사행무역은 조선에 사신으로 온 일본 사신단이 조선 국왕에게 물품을 진상하면, 조선은 그에 대한 답례로 물품을 하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 사신단은 입항 시 외교사절의 자격으로 경상도관찰사가 보내는 차사원의 접대를 받았으며 상경(上京)이 허락되면 한양의 동평관에 도착한 후 조선 국왕을 배알하고 진상과 회사의 절차에 의해 물품을 교환하였다. 일본의 진상품은 은, 구리, 납, 유황, 칼, 철기, 갑옷, 병풍, 연적 등과 동남아시아산 소목, 후추, 침향, 장뇌, 코뿔, 소뿔, 물소뿔, 상아 등이 대표적인 품목이었다.
정부의 관용 물품을 구입하기 위한 공무역도 진행되었는데 세종 초에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은 구리, 납, 소목, 후추 등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공무역은 물품의 교환 비율이 정해져 있었다. 수입품의 값은 대개 면주, 정포, 면포 등으로 지급했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이후에는 면포의 생산량이 늘고 일본 측의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면포의 수출량이 점차 증가했다.
변천
조선후기에 이르면 공무역의 형태도 변화를 맞이한다. 북경에 도착한 사행은 주로 회동관에 머물면서 뜰에서 진행되는 회동관개시에 참여하였다. 회동관개시는 상마연이 끝난 뒤에 청나라예부에서 관원이 상품의 불공정 거래자와 잠매자 및 거래 금지 품목의 매매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회동관의 벽에 고시한 뒤에 시작하였다. 고시 후 북경 각 점포 상인들이 화물을 싣고 회동관에 들어오면 예부가 파견한 감시관의 감독 아래 조선역관과 상인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졌다. 귀국길에 오를 때는 반드시 사신 일행이 무역할 물품의 수를 기록하여 청나라 아문에 제출하고 아문에서는 그 수를 점검한 뒤에 북경을 떠나게 되며 그것을 예부에 보고하여 산해관과 봉황성에 통보함으로써 사행의 귀환길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제하였다.
연경에서의 무역을 주도한 것은 역관이었다. 역관은 공무역을 주도함으로써 상당한 무역의 이익을 차지하였다. 역관들이 연경에서 수입한 물품은 주로 백사와 필단 등이었다. 필단으로는 백색단, 삼승방사주, 금단, 사단이 주를 이루었다. 연경에서 수입한 물품은 동료 역관들인 훈도와 별차가 주관하던 왜관개시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일본과의 공무역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양국 관계는 1610년(광해군 2) 무역을 허락하는 개시 약정이 체결되어 이듬해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교역은 조선과의 무역이 허락된 선박이 조선 국왕에게 예물을 바치는 데 대한 답례의 형식을 띤 조공의례적인 진상과 회사의 무역이었고 그 장소도 왜관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선 측이 필요로 하는 관아의 수요 물품은 그대로 매매되었다.
17세기 이후 전개된 일본과의 공무역 수출품은 중국산 견직물, 백사라고 불리는 생사, 조선산 인삼, 마른 해삼 등이었고 주요 수입품은 은, 구리, 무소뿔, 소목 등이 었다. 거래되는 물품에 대해서는 모두 거래가격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하였다. 17세기 이후 18세기 중반까지는 사행무역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중국산 견직물, 백사 및 조선산 인삼을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산 은을 수입하여 다시 이 은을 중국과의 무역에 투입하는 중개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청나라와 일본이 직접 무역을 하게 되면서 조선과 일본의 공무역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대일 수출 품목의 변화였다. 예를 들면, 인삼과 백사를 은으로 교환하던 것이 우피를 구리로 교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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