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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1일 (수) 23:3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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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임진왜란 |
한글표제 | 임진왜란 |
한자표제 | 壬辰倭亂 |
하위어 | 명량(鳴梁), 진주성(晉州城), 한산대첩(閑山大捷), 행주승첩(幸州勝捷) |
동의어 | 왜란(倭亂), 임진전쟁(壬辰戰爭) |
관련어 | 관군(官軍), 정유재란(丁酉再亂), 분조(分朝), 수군(水軍), 의병(義兵), 재조번방(再造藩邦), 재조지은(再造之恩), 정명가도(征明假道), 천병(天兵), 천장(天將), 행궁(行宮)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전기(16세기) |
왕대 | 조선전기(16세기) |
집필자 | 계승범 |
발생시기 | 1598~1598년 |
발생장소 | 한반도 |
관련 인물/집단 | 선조(宣祖), 풍신수길(豊臣秀吉),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이순신(李舜臣), 이여송(李如松), 유성룡(柳成龍),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대마도주(對馬島主), 심유경(沈惟敬)/ 조선(朝鮮), 명(明), 일본(日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임진왜란(壬辰倭亂) |
1592년(선조 25)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후, 명까지 개입하여 1598년까지 7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개설
일본을 통일하여 오랜 전국(戰國)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은 해외팽창을 목표로 전쟁을 일으켜 1592년 조선에 침입하였다. 초기 육전에서는 일본군이 승승장구하였으나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연승을 거두었다. 1593년 1월에 명이 참전하여 평양성을 수복하고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압박하자, 일본군은 한양을 포기하고 영남 해안지대로 물러갔다. 이후로 약 4년에 걸쳐 명과 일본 사이에 평화협상이 있었으나 끝내 결렬되자, 풍신수길은 1597년에 재차 대규모 공세를 취하여 다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육전과 해전에서 끝내 일본군을 물리쳤고, 마침 풍신수길이 병으로 죽자 일본군이 총퇴각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후반에 동아시아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중원을 중심으로 100년 이상 건재하던 명의 제국질서는 그 전성기가 지나고 있었고,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이해가 높아지면서 그런 지식으로 무장한 사림(士林)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유교적 문치가 더욱 공고해졌다. 반면에 일본은 서양과 접촉하면서, 또 오랜 내전을 겪으면서 문물이 발전하고 경제력과 군사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1580년대에는 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해외 팽창을 노리면서 동아시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발단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1587년(선조 20)부터 대마도주(對馬島主)를 통하여 조선에 통교를 요청해 오자, 조선에서는 통신사 파견 여부를 놓고 논의가 길게 이어졌다. 이때 풍신수길은 조선 왕이 직접 일본으로 와서 조회할 것[入朝]을 원하였으나, 그것이 불가함을 잘 아는 대마도주는 임의로 현소(玄蘇)를 내세워 통신사 파견을 조선 조정에 요청하였다. 오랜 논란 끝에 조선 조정은 1589년(선조 22) 11월에 초빙해 준 데 대한 답례[報聘] 성격의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고, 이듬해 3월에 황윤길(黃允吉)을 정사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11월에 풍신수길을 접견하고 답서를 받았으나, 오만한 내용이 많아 그것을 일부 고쳐서 1591년(선조 23) 3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보고를 통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을 파악하려 하였으나, 정사와 부사의 보고 내용이 서로 달라 결정이 쉽지 않았다. 정사황윤길과 서장관 허성(許筬) 등이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보고한 데 비하여, 부사김성일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하였다. 논란 끝에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하고, 남방의 경계 태세를 오히려 완화시켰다. 이후에도 전쟁이 임박하였다는 첩보가 이어졌으나 조선 조정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전쟁 발발 직전에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준비에 들어갔으나, 가시적인 효과는 없었다.
경과
명고옥(名古屋)에 총사령부를 설치한 일본은 1592년(선조 25) 4월 14일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선발대가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7년을 끌었는데, 이 전란 기간은 전황에 따라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1592. 4.~1593. 5.)는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육상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다가 조·명연합군에게 밀려 경상도 해안 지대로 후퇴하여 웅거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제2기(1592. 5.~1596. 12.)는 전쟁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하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이다. 제3기(1597. 1.~1598. 11.)는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일본군이 다시 병력을 증강하고 대거 침략을 감행한 정유재란(丁酉再亂) 시기이다.
전쟁 초기에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의 전투 병력은 모두 160,000명을 넘었다. 예상되는 침입에 대비를 소홀히 한 조선군은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일부 저항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전투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밀렸다. 조선의 희망이던 신립(申砬) 휘하 부대마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참패하자, 왕과 조정은 피난을 서둘렀다. 만일에 대비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서둘러 세자로 책봉하자마자, 왕과 조정은 4월 30일에 피난길에 올랐다. 일본군의 선발대는 5월 2일에 한양에 무혈로 입성하였는데, 이는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18일 만의 일로, 조선군의 저항다운 저항이 사실상 없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후에도 조선군은 계속 밀려 평양마저 적의 수중에 내주었으며, 선조와 조정은 의주까지 피난하여 행궁(行宮)을 차렸다.
일본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그나마 평양성에서 멈추게 한 요인은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수군이 일본군을 연파함으로써 바다를 지킨 점과 도처에서 봉기한 의병 덕분이었다. 5월 4일에 경상도 거제의 옥포(玉浦)에서 적을 격파한 이후 조선 수군은 6월 초순과 7월 하순에 사천(泗川)·당포(唐浦)·한산도(閑山島) 등 8차례 전투를 전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한산대첩을 계기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8월 하순에는 적의 본부가 있는 부산포를 해상에서 공격하였다.
수군의 승리와 짝을 이루어 육상의 의병도 향촌을 지키면서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초기의 불리한 전황을 교착 상태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관군과 연합작전을 펴고, 관군에 병력을 제공함으로써 조선군이 반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영남 지역의 의병이 대개 영남의 향촌 방위에 주력한 데 비하여, 호남 지역에서 봉기한 의병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큰 전투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의병은 일본군을 교란하고, 성을 사수하고, 빼앗긴 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처영(處英)·이정암(李廷馣)·정문부(鄭文孚)·휴정(休靜)·유정(惟政) 등을 꼽을 수 있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군을 일단 평양성에 묶어 두고 더 이상의 북진을 허용하지 않은 조선군은 12월에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43,000여의 명군(明軍)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였다. 조·명연합군은 1월 28일에 평양을 수복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일본군을 추격하며 급속히 남하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의 명군이 한양 부근의 벽제관(碧蹄館) 근처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하자, 이여송은 개성으로 후퇴한 뒤 또 평양까지 후퇴해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렇지만 조선군과 의병은 일본군이 웅거한 한양을 남쪽과 서쪽에서 느슨하게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며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율(權慄)이 이끈 조선군은 1593년(선조 26) 2월에 벌어진 행주산성(幸州山城)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함으로써 일본군이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진주목사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의병이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침으로써 호남 지역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퇴각한 일본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해안 지대를 점거한 채 전쟁이 소강상태에 놓이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이미 평양성 수복 이전부터 강화협상이 오갔는데, 이때 명을 대표한 자는 상인 출신 심유경(沈惟敬)이었고, 일본을 대표한 자는 소서행장이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던 대마도주와 서일본(西日本) 일대의 일본 영주들은 대개 평화적인 타결을 통하여 전쟁을 종결하려 하였고, 심유경 또한 조속한 종전을 이끌어 냄으로써 공을 세우려 하였다. 이들은 또한 당시 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명과 일본의 국서 내용을 임의로 위조하면서까지 평화적인 전쟁의 종결을 위하여 경주하였다.
이후 약 4년 가까이 심유경이 일본을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하였으나, 명 조정의 생각과 풍신수길의 생각에 현격한 차이가 있어,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다. 당시 풍신수길이 내세운 강화 조건은 명의 황녀(皇女)를 일본 천황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명과 일본 사이의 감합(勘合)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의 경기·충청·전라·경상 4도를 넘겨줄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심유경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탓에 북경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명 조정에서는 전통적인 조공·책봉제도에 따라 풍신수길을 일본국왕에 책봉한다는 내용의 조사(詔使)를 파견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풍신수길은 자신이 그동안 기만당한 것을 깨닫고 재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진상을 파악한 명 조정에서도 심유경을 소환해 사형에 처하고, 병력을 증강함으로써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하였다. 한편 이 협상 과정에 조선은 주체로서 참가하지 못하였으며, 일본군의 완전 철수가 선행되지 않은 어떤 협상도 거부한다는 입장을 명에게 전달하곤 하였다.
1596년(선조 29) 12월부터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다시 부산에 상륙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1597년(선조 30) 초에는 140,000이 넘는 전투 병력이 해안 지대에 집결하였고, 7월에 전면적인 총공세를 취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은 원균(元均)의 지휘 하에 있었는데, 거제의 칠천도 앞바다에서 참패함으로써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조선 수군을 제압한 일본군은 대규모 육상 공격을 감행하여 호남 지역으로 밀려들었다. 조·명연합군은 남원과 전주를 빼앗기고 수세에 몰렸으나 9월 초 천안 부근 직산(稷山)에서 일본군의 기세를 꺾는 데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명량(鳴梁)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이에 일본군은 다시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해안 지대로 퇴각해 웅거하였고, 전쟁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사이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에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사령부를 새로 세우고 병력을 증강했다. 명군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하여 일본군에 대한 총공격을 못하던 차에, 8월에 풍신수길의 병사(病死)를 계기로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하면서 다시금 전투가 불붙었다. 당시 순천을 빠져나가려던 일본군을 맞아 조·명연합군은 11월 18일과 19일에 걸쳐 격렬한 해전을 벌였다. 노량(露梁)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으나,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병선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 지휘부는 순천을 빠져나와 부산을 거쳐 한반도에서 완전히 퇴각하였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이 종결되었다.
전후에 명군도 조선에서 순차적으로 철군을 시작하여 1599년(선조 32) 9월에 완전히 떠났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은 국가의 물질적 토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전쟁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데 100여 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다. 일본에서는 종전 후 2년 만에 풍신(豊臣)막부가 무너지고 덕천(德川)막부가 들어섰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징비록(懲毖錄)』
- 『백사집(白沙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 기타지마 만지, 김유성·이민웅 옮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 李烱錫, 『임진전란사』,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6.
- 이장희, 『임진왜란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2007.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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