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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48 기준 최신판



사관이 역사로 남겨야 할 조정이나 사회의 사실을 기록한 문서의 초고.

개설

사초(史草)란 좁은 의미로는 전임사관인 예문관 봉교·대교·검열이 남긴 역사 기록의 초고(草稿)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는 전임사관과 춘추관 수찬관 이하의 겸임사관이 남긴 기록을 포괄하는 말이다. 사초는 두 부로 작성되었는데 하나는 사관(史官)들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작성하여 집에 보관한 가장사초(家藏史草)이고, 또 하나는 예문관(춘추관)에서 보관하는 사초이다.

사초를 이처럼 두 부로 구분하여 작성하고 나누어 보관한 것은 그 중 한 부가 어떤 이유로든 분실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사초는 사초와는 달리 조정이나 민간에서 듣는 어떤 정책이나 인물에 대한 세평(世評) 등을 종합하여 자신의 의견을 적을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 의미가 중요하였다.

사초는 비공개로 관리되었다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모두 거두어들였다. 특히 『세조실록』 편찬 때부터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적어 제출하도록 법제화된 뒤에는 필화를 우려하여 제출된 사초의 내용을 고치는가 하면, 그로 인해 옥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예종 초에 일어난 ‘민수(閔粹)의 옥’이 그 예이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 편찬을 마친 뒤 세초(洗草)하였으므로 원래는 전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수가 남아 있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 건국 이후 사료의 기록과 수집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1392년(태조 1) 9월 예문춘추관이 올린 상서이다. 상서의 내용은 첫째, 사관을 정전 좌우로 입시케 하여 대소사를 막론하고 모두 참여하여 보고 듣도록 하고, 둘째, 충수찬(充修撰) 이하 겸임사관은 각각의 견문에 따라서 사초를 작성하여 예문춘추관으로 보내며, 셋째, 경외 대소 아문(衙門)에 공문을 보내 각각 시행한 일 중에 정령(政令)에 관계되고 후세에 감계(鑑戒)가 될 일은 예문춘추관에 보고하고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도 매월 말에 조례를 적어서 본관에 보내어 기록의 근거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태조실록』 1년 9월 14일). 이것이 이후 조선시대 사초 작성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서지 사항

사초는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 뒤 세초(洗草)되었지만 현재 약 27종의 사초가 남아 있어 대강의 실제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정태제(鄭泰齊) 사초 등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료총서로 『조선시대 사초』를 간행할 때 포함되었고, 이담명(李聃命)의 승정원「주서본초책(注書本草冊)」 등이 서울역사박물관의 『승정원사초』에 실려 간행되었다.

구성/내용

조선 건국 초기에는 사초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때문에 태조는 즉위 이후 사초를 바치게 하였다가 신료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당나라 태종이 실록을 보았던 고사를 들어 여러 차례 사초를 들일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태종대를 거쳐 세종대에 이르러 사초를 수납하는 방안과 사초의 비밀 보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사초의 관리에 대한 원칙이 확립되었다.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의 편찬에 즈음하여 사초는 왕이 승하한 후 수납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웠다. 또 사관의 자손이 보관할 경우 예견되는 사초의 분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초 분실자를 처벌하는 규정이 정하여졌다.

1434년(세종 16)에는 6명의 승지(承旨)와 좌·우사간(左·右司諫)·의정부 사인(舍人)·서연관(書筵官) 두 사람과 8명의 한림(翰林)에 더하여 이조(吏曹)·병조(兵曹), 경연관, 사헌부·승문원 관원 등도 사관을 겸임하게 하여 기사(記事)를 넓힘으로써 사초의 작성에 내실을 기하였다(『세종실록』 16년 11월 5일).

1449년에는 사초의 보존과 관리를 위한 최종적인 원칙 6조목이 천명되었다. 춘추관에서는 "사초는 모두 군신(君臣)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므로 극히 중요하여 다른 문서에 비할 바가 아니니 금방(禁防)이 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① 만일 사관이 자신과 관계된 일이라 하여 꺼리거나, 친척이나 친구의 청탁을 듣거나 하여 흔적을 없애려고 사초첩[卷綜]을 전부 훔친 자는 ‘도제서율(盜制書律)’을 적용하여 참(斬)할 것, ② 도려내거나 문지르거나 먹으로 지운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논하여 참할 것, ③ 동료 관원으로서 앞의 죄를 저지른 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기훼제서율’에서 한 등급을 낮출 것, ④ 사초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는 자는 ‘근시관으로 기밀 중사를 누설한 죄’에 따라 참할 것, ⑤ 위의 사항에 해당되었다가 사면을 받더라도 정범(正犯)은 고신(告身)을 박탈하여 영구히 서용하지 아니하되, 만일 범인이 죽었으면 추탈할 것, ⑥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와 누설한 자는 직첩만 회수할 것 등을 법제화하였다(『세종실록』 31년 3월 2일).

예문관 참외관을 중심으로 기사사관의 지위가 공고해지면서, 사초가 당대의 정치와 사회, 인물에 대한 궁극적 평가라는 인식이 확고해졌고, 사초의 관리도 그에 상응하여 책임 있는 관리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사초 제출자의 성명을 기입하도록 하였고,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거치면서 편찬 중에 사초를 누설하는 행위도 처벌 대상에 추가하는 등 관리 규정을 강화하였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조선시대 사초Ⅰ-사초·인조 무인년 사초』, 국사편찬위원회, 1995.
  • 국사편찬위원회 편, 『조선시대 사초Ⅱ-『필재당후일기』 외』,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 이담명 저, 서울역사박물관 편, 『(廣州李氏家)承政院史草 : 影印本.1』, 서울역사박물관, 2004.
  • 정구복,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 한우근, 「조선 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관한 연구」,『진단학보』6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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