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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4 기준 최신판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제향하기 위한 사묘(祀廟).

개설

진종(眞宗)으로 추존된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우(祠宇)이다.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창의궁(彰義宮) 내에 건립되었으나 정조 때 진종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으로 추존되어 종묘에 신위를 봉안하면서 그 기능을 잃었다.

위치 및 용도

효장세자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 지내기 위한 곳이다. 현재 경복궁의 서쪽 통의동에 있었던 영조의 잠저 창의궁 내에 있었다.

변천 및 현황

효장묘에 신위가 봉안된 효장세자는 1719년(숙종 43) 2월 15일 영조와 정빈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4년(영조 즉위)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으며(『영조실록』 즉위년 11월 3일) 다음 해 왕세자에 책봉되었다(『영조실록』 1년 2월 25일).

1726년(영조 2)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孝純王后)와 가례를 올렸으나(『영조실록』 3년 8월 28일),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훙서했다(『영조실록』 4년 11월 16일).

훗날 영조에 의해 이복동생 장조(莊祖)의 아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진종에 추존되었다. 시호(諡號)는 효장(孝章)이다. 1908년(융희 2) 순종 때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순종실록』 1년 5월 11일).

1729년(영조 5) 효장세자의 대상(大祥)이 끝나고 신위를 봉안할 사묘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이 동궁(東宮)에 속한 것이니 사세가 편할 것이라 하여 그곳에 건립하기로 결정되었다. 1730년(영조 6) 에 사우(祠宇)가 완성되었다(『영조실록』 6년 6월 19일). 정조 때 종묘에 부묘하면서 효장묘의 기능은 없어졌다.

형태

효장묘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의궁배치도(彰義宮配置圖)」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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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창의궁배치도(彰義宮配置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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