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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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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심현 |
한글표제 | 심현 |
한자표제 | 沈誢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장준호 |
자 | 사화(士和) |
시호 | 충렬(忠烈)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8년(선조 1) |
사망 | 1637년(인조 15) |
본관 | 청송(靑松)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시흥 |
증조부 | 심달원(沈達源) |
조부 | 심자(沈鎡) |
부 | 심우정(沈友正) |
모_외조 | 광릉 안씨(廣陵安氏) : 안여경(安汝敬)의 딸 |
형제 | (동생)심집(沈諿) |
처_장인 | 여산 송씨(礪山宋氏) : 송영(宋寧)의 딸 →(자녀)2녀 |
자녀 | (1녀)홍헌(洪憲)의 처 (2녀)박훤(朴煊)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현(沈誢) |
총론
[1568년(선조 1)∼1637년(인조 15) = 70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 등을 지냈다. 자는 사화(士和)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낸 심우정(沈友正)이고, 어머니 광릉 안씨(廣陵安氏)는 목사(牧使)안여경(安汝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첨정(僉正)을 지낸 심자(沈鎡)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심달원(沈達源)이다.
관직 생활과 충절
심현(沈誢)은 후릉참봉(厚陵參奉)으로 처음 출사하였고, 그 뒤 흡곡현령(翕谷縣令)이 되었다.[『낙전당집(樂全堂集)』 권12 「돈녕도정심공기숙부인송씨합장묘갈명병서(敦寧都正沈公曁淑夫人宋氏合葬墓碣銘幷序」 이하 「심현묘갈명」으로 약칭] 이어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역임하였는데, 도랑을 파서 물을 대어 약 130만평의 논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가자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이후 철원부사(鐵原府使)와 회양부사(淮陽府使) 등을 지냈으며, 1635년(인조 13) 돈녕부 도정이 되어 사형수들의 심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3년 11월 21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년 8월 23일, 인조 8년 4월 24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심현은 숙채(宿瘵 : 오래된 폐 질환)가 있었음에도 강화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맹세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2일, 「심현묘갈명」] 그는 청군(淸軍)이 강화도를 침공하는 날 먼저 가묘(家廟)의 신주(神主)를 외진 곳에 묻어 두고, 손수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遺疎)를 작성하여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맡겼다. 그리고 의관을 정돈하고 북쪽을 향해 4번 절한 다음 목을 매어 자결(自決)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2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때 심현의 부인도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2일] 인조는 심현의 충절과 그의 부인 여산 송씨(驪山宋氏)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그들을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기용해서 충렬을 표시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2일, 인조 15년 8월 27일]
이후 강화도의 사민들은 병자호란에 순절한 심현을 비롯하여 김상용(金尙容)과 이상길(李尙吉), 이시직(李時稷), 송시영(宋時榮), 구원일(具元一) 및 남양부사(南陽府使)윤계(尹棨) 등을 배향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인조실록』인조 18년 8월 13일] 1649년(효종 즉위년) 병자호란 당시 사절(死節)한 이들에 대하여 정려만 하고 증직만 한 것이 애석하다는 송준길(宋浚吉)의 의견에 따라 심현은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11월 6일, 효종 즉위년 11월 8일] 그리고 1657년(효종 8)에는 강화도에 세웠던 사당에 ‘충렬(忠烈)’이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이어 강화유수(江華留守)이선(李選)의 요청에 따라 1683년(숙종 9)에는 심현에게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효종실록』효종 8년 11월 28일, 효종 9년 6월 24일, 『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7년 5월 21일, 숙종 9년 6월 24일]
성품과 일화
심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그 도리를 다 했고 동기간에는 그 정을 다 했으며, 벼슬에 있을 때는 그 힘을 다 했고 난을 당해서는 그 절개를 다 했다.[「심현묘갈명」]
한편 부인 여산 송씨는 영의정송질(宋軼)의 손녀이자, 목사송녕(宋寧)의 딸이다. 여산 송씨는 순수한 덕과 착한 용의로 시부모를 잘 모셨고, 『여계(女誡)』를 통달해 이로운 것과 의리를 분별하였다. 이에 시아버지는 “반드시 절부가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목욕재계를 한 후 남편 심현을 따라 자결하던 모습이 극락을 가는 것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청군이 물러간 뒤 1637년(인조 15) 3월 10일에 장사를 지냈다.[「심현묘갈명」]
후손 및 묘소
심현의 묘소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데, 부인 여산 송씨의 묘와 함께 있다.
그는 여산 송씨와의 사이에 2녀를 두었다. 장녀는 승지(承旨)홍헌(洪憲)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직장(直長)박훤(朴烜)에게 출가하였다. 박훤의 아들인 박장원(朴長源)은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지냈다.[「심현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계집(桐溪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조야집요(朝野輯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