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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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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평군 이말생 |
한글표제 | 도평군 이말생 |
한자표제 | 桃平君 李末生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태종~성종 |
집필자 | 윤경수, 김구진 |
호 | 계회(季悔) |
봉작 | 도평군(桃平君), 도평정(桃平正) |
시호 | 효헌(孝獻) |
출신 | 서울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현)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월계동 소라산(蘇羅山)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방과(李芳果): 정종(定宗) |
모_외조 | 지성빈(池誠嬪): 지숙의(池淑儀), 충주 지씨(忠州池氏), 지윤(池奫)의 딸 |
형제 | (형)이원생(李元生): 의평군(義平君) (형)이무생(李茂生): 선성군(宣城君) (형)이후생(李厚生): 덕천군(德泉君) (형)이호생(李好生): 임성군(任城君) (누이)함양옹주(咸陽翁主): 박갱(朴賡)의 처 |
처_장인 | (첫째부인)용인 이씨(龍仁李氏): 이수강(李守綱)의 딸 →(자녀)1남 (둘째부인)전주 최씨(全州崔氏): 최수(崔洙)의 딸 →(자녀)1녀 |
자녀 | (1자)이창(李昌): 수성군(壽城君) (1녀)정여창(鄭汝昌)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평군 이말생(桃平君 李末生)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17년 9월 5일 |
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전기 태종~성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12왕자. 봉작(封爵)은 도평군(桃平君)이다. 자는 계회(季悔)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지성빈(池誠嬪)인데, 숙의(淑儀)였다가 성빈(誠嬪)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충주 지씨(忠州池氏)로서 고려 문하성(門下省) 찬성사(贊成事)지윤(池奫)의 딸이다. 지성빈은 5남 1녀를 낳았는데 도평군이말생은 그 중 막내 아들이다. 동복 형은 의평군(義平君)이원생(李元生), 선성군(宣城君)이무생(李茂生), 덕천군(德泉君)이후생(李厚生), 임성군(任城君)이호생(李好生)이고, 동복 누이는 함양옹주(咸陽翁主)다. 정종은 적실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장례와 제사 때에 의평군이원생이 맏아들 역할을 하였다. 지윤의 맏딸은 태조이성계(李成桂)의 맏아들 진안대군(鎭安大君)이방우(李芳雨)의 정실부인이 되었으나, 지성빈은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의 후실(後室)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 지윤이 최영 · 이성계에게 패망한 뒤에 지씨 집안이 몰락하여 후실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이방과가 정종이 되자, 후궁으로 봉해졌다.
세종의 지우(知遇)
1435(세종 17) 9월 종부시(宗簿寺)에서, “정윤(正尹) 이말생이 거짓으로 유모(乳母)의 복(服)이라 알리고, 두 번을 입었으니, 구사(丘史)를 빼앗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여 처벌을 받았다.(『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17년 9월 5일) 1439년(세종 21) 사헌부(司憲府)에서 원윤(元尹) 이말생이 기생첩을 사랑한다고 탄핵하니, 세종이 이를 용서하였으나, 다시 음란한 행위로 부모를 욕되게 하였다고 하니 그의 고신(告身)을 거두고 구사를 빼앗았다. 1441년(세종 23) 세종은 원윤 이말생에게 고신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1443년(세종 25) 5월 종부시에서 원윤 이말생이 정처(正妻)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를 소박하고 기첩(妓妾)만을 사랑한다고 아뢰자, 세종이 그의 고신을 다시 빼앗았다. 1455(단종 3)년 1월 세종은 다시 이말생의 고신을 돌려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경서와 시문에 통달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태종이 그를 초청하였을 때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으나 세종이 초청하였을 때는 기꺼이 응하였다. 그때 세종이 그에게 경서(經書)와『춘추전(春秋傳)』의 내용을 물어보자, 그는 거침없이 대답하였으므로, 세종이 “과연 듣던 바와 같이 훌륭하고 충효의 덕망이 높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아들 이창(李昌)은 1435년(세종 17) 현랑과(賢良科)에 급제하였고, 1459년(세조 5) 8월 수성정(壽城正)이 되었으며,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는데, 효도가 극진하였다고 한다. 세종 시대는 부자가 모두 세종의 칭찬을 받고 이름을 드날렸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이말생은 세조 때부터 조정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도평정(桃平正) 이말생은 1458년(세조 4) 세조가 궁궐 후원에서 활을 쏘는 것을 구경할 때 다른 종친들과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또 1460년(세조 6) 세조가 황해도, 평안도를 순행할 때 도평정으로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 ·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과 함께 호종하였고, 1444년(세조 12) 지방의 폐단을 조사하는 문폐사(問幣使)가 되어 여러 지방에 돌아다녔다. 1468년(예종 즉위)에 도평군(桃平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70년(성종 1) 성종이 일본사신을 접대할 때 월산대군(月山大君)과 함께 입시하였다.
성품과 일화
도평군이말생은 학문에도 뛰어나고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태종이 그의 학문이 뛰어남을 알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태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태종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는데, <왕자의 난>으로 형제간에 골육상쟁을 일으켜 아버지 태조이성계에게 불효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세종이 초청하였을 때 흥쾌히 응하여 서로 경서문답을 한 것을 보면, 그의 학문적인 안목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인간성이 유교의 가르침대로 효도를 잘 실천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효헌(孝獻)라고 받았으며, 아들 이창도 시호를 효민(孝敏)이라고 받았는데, 효도를 대물림하는 집안인 것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월계동 진답리(陳畓里)[『선원보(璿源譜)』]와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월계동 소라산(蘇羅山)[『선원강요(璿源綱要)』]에 있다고 전해진다.
첫째부인은 용인 이씨(龍仁李氏)이수강(李守綱)의 딸인데, 아들 수성군(壽城君)이창(李昌)을 두었다. 그녀가 1432년(세종 14) 10월 사망하자, 조정에서 사제(賜祭)하였다. 둘째부인 전주 최씨는 최수(崔洙)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1녀는 정여창(鄭汝昌)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보(璿源譜)』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璿源系譜)』
- 『충주 지씨 보략(忠州池氏譜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