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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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41 기준 최신판




총론

[1426(세종 8)∼1457(세조 3) = 32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의 적출 8남 2녀 중에서 제 6왕자. 봉작(封爵)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서 영의정심온(沈溫)의 딸이다. 친형은 문종(文宗), 세조(世祖),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 광평대군(廣平大君)이여(李璵)이고, 친동생은 평원대군(平原大君)이림(李琳),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이고, 친누이는 정소공주(貞昭公主)정의공주(貞懿公主)다.

세종 시대 활동

1433년(세종 15) 1월 나이 8세 때 금성대군이 되었다. 1435년(세종 17) 4월 나이 10세 때에 종학(宗學)에 입학하여, 여러 대군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1437년(세종 19) 나이 12세때에 참찬(參贊)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7년(세종 19)에 세종은 금성대군이여를 태조의 제 8왕자 이방석(李芳碩)의 후사로 삼아서, 사당을 짓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441(세종23) 9월 세종은 금성대군 집에 거동하니, 이때 세간을 났기 때문이다. 1445년(세종 27) 봄에 화포(火砲) 제작할 때 세종이 임영대군과 금성대군에게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화포는 태종 때부터 먼 거리까지 이르도록 하기위해서 애를 썼으나 발전이 없었다. 기존의 화포는 화살이 2백보에서 5백 보(步)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때 제작한 화포는 화살이 4백보에서 1천 5백 보에 이르게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27년 3월 18일)

단종 복위 운동

문종은 세자 단종의 나이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보필을 명하고, 또 성삼문(成三問) · 신숙주(申叔舟) · 박팽년(朴彭年) 등에게도 좌우협찬(左右協贊)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도 또한 사정전(思政殿)에서 좌우에게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452년에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은 정권탈취의 야심을 품고 1453년(단종 1) 10월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왕자들 사이에서 수양대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나뉘었는데,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에 반대하고 단종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1455(세조 1) 세조가 즉위하여, 단종을 키워준 양혜빈(楊惠嬪)을 추방하여 처형할 때 금성대군은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이 무렵에 성삼문 · 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김질(金礩)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는데, 금성대군도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순흥부사(順興府使)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1457년(세조 3) 6월에 안동(安東)의 관노(官奴)이동(李同)이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이징석(李澄石)에게 제보하는 바람에, <금성군 모반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서, 이해 10월에 반역죄로 순흥에서 처형되었다.

묘소와 후손

1731년(영조 7) 영조 때 단종의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6종영(六宗英)을 차례로 배향(配享)하였는데, 6종영은 안평대군이용 · 금성대군이유와 화의군(和義君)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이어(李*), 영풍군(永豊君)이천(李瑔), 중추원 판사이양(李穰)이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적에 6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도 괴산군 청안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묘소는 현재 충청북도 청원군 이원면 대신리에 있고, 사우(祠宇)는 1740년(영조 16)에 창건하였는데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수의마을에 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0호로 1990년 12월 14일에 지정되었다.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영의정최사강의 딸이다. 최사강의 다른 딸은 태종의 서출 제 2왕자 함녕군(諴寧君)의 부인이고, 손녀는 세종의 제 4왕자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부인이다. 아들 이맹한(李孟漢)은 함종군(咸從君)으로 추증되었다. 서출 아들은 이동(李銅)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명의록(明義錄)』
  • 『서계집(西溪集)』
  • 『음애일기(陰崖日記)』
  • 『청성잡기(靑城雜記)』
  • 『퇴계집(退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