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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6: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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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월곶진 |
한글표제 | 월곶진 |
한자표제 | 月串鎭 |
관련어 | 교동현(喬桐縣), 병마첨제사(兵馬僉節制使),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훈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월곶진(月串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6년 7월 11일, 『인조실록』 7년 2월 24일, 『숙종실록』 7년 5월 21일 |
조선시대 경기도의 월곶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첨사진.
개설
초창기에는 경기도교동현(喬桐縣)에 있었고, 수군의 진관이었다. 교동은 서해에서 수도인 한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연해 방위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진관체제로 개편되면서 육군의 장단진에 소속되었다. 이에 별도로 월곶(月串)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진관(鎭管)을 설치하였다.
인조대에 이르러 경기도의 수영을 교동으로 옮기면서 변모하였다. 위치를 강화로 옮기고 수군 진영 대신 육군 진관으로 개편하였다. 이는 부근 지형 상황과도 연관이 있었다. 육군 진관은 대체로 앞서 수군진일 때 소속되었던 제진을 일정 부분 그대로 유지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처음에는 경기도교동현의 수군진영(水軍鎭營)이었다. 교동은 일찍부터 해상 교통의 요지로서 서해에서 한성으로 들어오는 문호(門戶)였다. 이로 인해 연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395년(태조 4)에 수군만호를 두어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했다가 뒤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그리고 진관체제로 개편되면서 장단진(長湍鎭)에 소속되었다. 대신 월곶에 수군첨절제사를 두어 부근의 수군을 통솔하게 했다. 이를 근거지로 삼아 비로소 수군 진관이 성립되었다.
월곶진의 구체적인 모습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 있는데, 종3품의 월곶수군첨절제사가 진관을 통솔하되, 영종포(永宗浦)·초지량(草芝粱)·제물량(濟物梁)·정포(井浦)·교동량(喬桐梁)에는 종4품의 수군병마를 두어서 지휘를 받게 했다. 다만 교동량에서는 현감이 겸하도록 했다.
조직 및 역할
평상시 월곶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외적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검문하고 수색해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광해군일기』 6년 7월 11일). 이것을 위해서 항상 일정한 수의 군선(軍船)을 배치해서 해상을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했다. 그 관련 내용이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데, 3층으로 된 큰 싸움배인 대맹선(大猛船)은 영종포에 1척과 월곶에 3척을 두었다. 중간 크기의 중맹선(中猛船)은 월곶에 6척, 정포에 3척, 영종포에 2척, 초지양과 제물양에 각각 1척씩을 두었다.
소맹선(小猛船)은 초지양에 3척, 영종포·월곶·정포에 각각 2척씩, 제물양에 1척을 두었다. 그리고 긴급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예비용으로 비치해 두었던 군선인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의 경우, 정포에 2척, 영종포·초지양·제물양·월곶에 각각 1척을 두었다. 이렇듯 진관 소속의 제진에 각 지역의 사정을 고려하여 여러 종류의 군선을 알맞게 배치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변천
1629년(인조 7)에 경기도의 수영(水營)을 교동으로 옮기면서 현을 부(府)로 승격시켰다. 수군절도사로 하여금 부사(府使)를 겸하게 했고 이를 계기로, 월곶진을 없애고 화량진(花梁鎭)을 다시 두었다(『인조실록』 7년 2월 24일). 뒤에 다시 월곶을 강화(江華)로 옮겼다가 1656년(효종 7)에 병마첨절제사를 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종전의 수군 진관에서 육군 진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것은 주변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즉 월곶부터 덕진(德津)까지는 강폭이 좁고 물살이 급해서 수군을 쓰기가 어려우나, 두 강의 경계가 나뉘는 곳으로서 수로 가운데 제일의 요충지가 된다. 그러므로 만약 월곶부터 섬암(蟾巖)까지 수군을 배치해 놓고, 해면이 주기적으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조석(潮汐)의 형세를 이용해 배를 운항시킨다면 오히려 가하다는 것이었다(『숙종실록』 7년 5월 21일).
바뀐 형태가 『속대전(續大典)』에 상세히 기재되었다. 월곶진에 종3품의 병마첨제사를 두어서 진관을 통솔하되, 그에 소속된 초지량 역시 수군만호 대신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또한 제물량에서도 수군만호 대신 종4품의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고서 지휘를 받게 했다. 정포는 혁파되었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도로 부활시키되, 병마만호를 두었다. 한편으로 영종포는 수군첨절제사를 두어 진으로 독립시켰다. 대체로 종전의 월곶진이 관할하던 제진을 일정 부분 인수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방상현, 『조선초기 수군제도』, 민족문화사, 1991.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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