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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6: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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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유도군 |
한글표제 | 유도군 |
한자표제 | 留都軍 |
상위어 | 병조(兵曹), 오군영(五軍營),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
동의어 | 유도군병(留都軍兵) |
관련어 | 갑사(甲士), 거둥[擧動], 군영(軍營), 군영대장(軍營大將), 군호(軍號), 궁궐(宮闕), 궁성(宮城), 금위영(禁衛營), 능침(陵寢), 능행(陵幸), 도성(都城), 동가(動駕), 병문(屛門), 생기(省記), 수가(隨駕), 수궁대장(守宮大將), 수궁장(守宮將), 수문(守門), 수직(守直), 숙위(宿衛), 순행(巡幸), 시위(侍衛), 어영청(御營廳), 오위(五衛), 온행(溫幸), 왕성(王城), 유도대신(留都大臣), 지송(祗送), 지영(祗迎), 행차(行次), 행행(行幸), 훈련도감(訓鍊都監)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왕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도군(留都軍) |
왕이 궁궐 밖으로 행행할 때 궁궐과 도성의 경비를 임시로 담당하던 부대.
개설
유도군(留都軍)의 ‘유도(留都)’는 도성에 머문다는 말이다. 유도군은 왕이 도성을 벗어나는 행행으로 외부에서 머물 경우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일시적으로 담당했던 부대를 말한다. 유도군은 왕의 거취에 따라 조성되는 임시 부대인 만큼 조선전기와 후기에 따라 병력 구성에 차이가 있었다. 조선전기의 군사 제도는 오위(五衛)를 중심으로 하는 상번병 체제였으므로 갑사(甲士)들이 중심이었다. 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중앙군이 군영(軍營) 체제로 변경되면서 유도군도 각 군영의 병력 중에서 선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유도군에서 갑사가 중심인 시기에는 병조(兵曹)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서 지휘를 담당하였지만, 오군영 체제하에서는 각 군영의 대장들이 왕의 임명에 따라 수시로 번갈아가며 담당하였다. 군영대장이 집권 정치 세력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에 따라서 유도군의 지휘가 맡겨지기도 했다. 예컨대 반정과 같은 정치 변동에 군사력이 동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왕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반대 세력 출신의 무신(武臣)을 대장으로 두지 않았다. 더욱이 왕이 궁궐을 비운 사이 도성의 치안과 경비를 책임지는 유도군을 적과 내통하거나 반란군과 합류할 만한 존재들로 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에는 왕이 행행을 준비하면서 오군영의 한 부대를 정하고, 왕과 측근 세력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 있는 군영의 대장을 유도군 대장으로 선발하였다.
담당 직무
유도군의 직무는 왕이 궁궐을 벗어나 도성 외부로 행행하여 행궁에서 하루 이상 거처하고 오는 경우에 궁궐과 도성의 경호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왕이 도성을 비운 사이 궁궐은 수궁대장과 유도대신이, 도성은 유도대장이 남은 군 병력을 지휘하며 성문의 개폐(開閉), 성벽과 도성 내의 순찰을 지시하였다.
유도군의 군사 체제는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다. 조선전기는 5위 체제에 맞추어 군사를 5번(番)으로 나누어 경비하도록 하였다. 반면, 조선후기에는 군영의 조직 체계에 따라 운영되었는데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돌아가며 담당하였다.
조선전기의 경우, 『경국대전』에는 “유도군이 세 곳으로 나누어 둔(屯)을 치되 날마다 진(陣)을 바꾼다.” 하여 궁궐 내부에 2개 부대가 진을 치고 외부에 1부대가 경계를 하였다. 조선후기의 경우 유도군은 군영군이었지만, 해당 부대의 대장이 지휘하지는 않았다.
광해군 이후 인조반정부터 수차례의 정변(政變)을 거치면서 중앙군의 핵심인 군영군을 왕 이외의 정치 세력에게 전담하게 하는 위험 부담은 배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점은 현종과 숙종대 군영의 개편과 군영군의 증설에 대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논쟁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유도군은 왕이 임명한 다른 군영의 대장이 인솔하는 형태였다. 이 점은 행행을 수행하는 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행행할 때 동반하는 수가대장(隨駕大將)은 자신의 부대를 통솔하지 못하고 다른 군영의 병사들을 인솔했다. 이는 왕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정변을 예방하는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왕이 도성을 벗어난다고 해도 중앙군의 무력은 어느 누구에게도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없었으며, 그 예방책이 유도군이었다.
유도군은 궁궐의 내외에서 숙위(宿衛)하였으며, 왕이 궁궐로 돌아온 뒤에 그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도군은 매일 정해진 시간 도성의 경비 상태와 전날 야간의 숙위 상황을 왕에게 긴급으로 보고하였으며, 보고는 왕이 궁궐로 돌아오는 날까지 지속하였다.
변천
유도군은 왕이 궁궐과 도성을 벗어난 상황에서 숙위를 전담하던 임시 부대였으므로 행행이 지속되던 고종대에도 구성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군제의 개편에 따른 군영의 해체와 신식 군대의 성립, 경복궁과 창덕궁 체제에서 경운궁이라는 법궁(法宮)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유도군이 필요하지 않아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신식 군대의 도입과 근대 교통 기관의 설치는 유도군과 같은 대규모의 구식 군대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더욱이 고종이 순종과 함께 기차를 이용하여 부산과 의주를 장거리로 행행하는 기간에 유도군보다는 헌병과 경찰 병력이 궁궐과 도성을 순찰·경비하였으므로 유도군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웠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어영청거둥등록(御營廳擧動謄錄)』
- 『금위영거동등록(禁衛營擧動謄錄)』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온행 연구」, 『국사관논총』 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도성내 행행의 추세와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행행시 궁궐의 숙위와 유도군 연구」, 『군사』 62,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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