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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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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은문 |
한글표제 | 영은문 |
한자표제 | 迎恩門 |
관련어 | 독립문(獨立門), 모화관(慕華館), 사대(事大), 연빈관(延賓館), 영조문(迎詔門), 외교(外交) |
분야 | 문화/예술/건축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연노 |
관련 인물 | 설정총(薛廷寵), 주지번(朱之蕃)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은문(迎恩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8월 22일, 『세종실록』 7년 10월 29일, 『성종실록』 9년 6월 10일, 『중종실록』 21년 6월 13일, 『중종실록』 32년 1월 2일, 『선조실록』 39년 6월 3일 |
모화관 앞길에 위치하며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대문.
개설
조선왕조가 중국과의 외교를 사대(事大)로 규정하면서 명나라 혹은 청나라 사신이 한양에 입성할 때 의례적으로 지나가던 문으로, 조선과 중국의 외교적 관계를 대외적으로 상징하던 건물이다.
위치 및 용도
영은문(迎恩門)은 본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지만 현재 이곳에는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이 위치하고 있다.
변천 및 현황
1407년(태종 14(→7))에 태종은 개경의 연빈관(延賓館)을 모방해 관사를 짓고, 문신들에게 각각 이름을 지어 바치게 했는데 성석린이 모화(慕華)라는 이름을 제안해 모화루라고 편액했다(『태종실록』 7년 8월 22일). 이듬해 모화루 남쪽에 거대한 연못을 만들었다. 이 연못에서는 후대에 석척동자(蜥蜴童子), 즉 도마뱀을 이용해 기우제를 지냈는데, 무관 종2품관이 연 3일간 실시하였다. 1430년(세종 12)에는 모화루를 수리한 후 기존의 이름을 바꿔 모화관이라고 했다. 또한 이곳에는 매우 넓은 공터가 있었기 때문에 무과 시험장으로 삼고 무이소관(武二所館)이라 하였다.
모화관 앞길에는 영조문(迎詔門)이 있었다. 영조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25년에 등장하는데 처음 모화루를 조성할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이 직접 칙서를 받는 곳이기 때문에 영조문을 크게 지으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시도되었다(『세종실록』 7년 10월 29일). 1478년(성종 9)에 영조문을 수리한 일이 있는데 이때 성종은 영조문의 모형[小樣]을 보고 너무 화려하다 하여 이전과 같이 만들 것을 지시했다(『성종실록』 9년 6월 10일).
1526년(중종 21)에도 영조문을 새롭게 조성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예조에서 영조문의 제도가 매우 초라하니 중국 패루 모양을 본떠서 하나의 기둥을 연달아 세 칸의 문으로 조성해 액호를 걸자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이것이 사대의 경중에 관계되지 않을 뿐더러 모화관은 열무(閱武)하는 곳이라 격구(擊球)하면서 말을 달릴 때 방해가 된다고 하여 반대하였다(『중종실록』 21년 6월 13일). 또 1537년에는 김안로가 영조문의 홍문(紅門)이 너무 초라하니 크게 짓지는 못하더라도 보통 집의 일각문처럼 기와로 덮고 ‘영조문’이라는 편액을 걸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두 기둥의 대문인 쌍주일문(雙柱一門)을 건립하고, 청기와로 덮은 다음 ‘영조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중종실록』 32년 1월 2일). 이후 1539년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맞이하는 것은 조(詔), 칙(勅), 뇌(賚) 등이 있는데, ‘조’라고만 이름 하는 것은 치우친 것 같다.” 하면서 현판을 고쳐 써서 ‘영은문’이라고 했다. 이후 영조문은 영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1606년(선조 39)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영은문의 편액 2건을 써 준 후 그중에서 하나를 판각하여 걸라고 하였다(『선조실록』 39년 6월 3일). 이때 만들어진 주지번의 현판은 현재도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후 영은문은 1642년(인조 20)에 중수한 일이 있으며, 1661년(현종 2)에 수리하였다. 또 1706년(숙종 32)에 서쪽 기둥이 오래되어 썩은 것을 교체한 일이 있고, 1731년(영조 7)에도 수리하였다.
영은문은 조선말까지 계속 존재하다가 1895년(고종 32) 2월에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듬해 1896년에는 서재필의 주도 하에 영은문 옆에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곳에 독립문을 세운 것은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 사신이 오는 것을 은혜로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영은문 주초석은 1934년 본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옮겨져 독립문 앞에 세워졌으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새로 조성된 독립공원 안에 독립문과 함께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방으로 약 70m 이전되었다.
형태
영은문은 현재 독립문 전면에 초석만 남아있다. 초석은 장주형 초석으로 민흘림을 갖고 있는데 4변의 모를 죽여 팔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원래 영은문은 지붕이 우진각지붕이며 다포식의 공포를 사용했다. 지붕에는 양성을 발랐고, 잡상과 용두를 달아 권위를 부여했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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