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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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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금강산도 |
한글표제 | 금강산도 |
한자표제 | 金剛山圖 |
동의어 | 풍악도(楓嶽圖), 해산도(海山圖), 해악도(海嶽圖) |
관련어 | 김홍도(金弘道),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민화(民畵), 시화일치(詩畵一致), 정선(鄭敾),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 최해(崔瀣), 화엄경(華嚴經), 화첩(畵帖)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탁현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금강산도(金剛山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예종실록』 1년 4월 27일 |
금강산의 풍경을 그린 산수화.
개설
금강산은 예로부터 빼어난 절경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산(名山)이자 금수강산을 대변하는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겨져 왔다. 금강산은 현전하는 설화문학, 기행 산문, 기행 서사시, 회화 등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소재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후기 때부터 그림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금강산도(金剛山圖)는 한국적인 실경을 표현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 중 단일 소재로 가장 많은 작품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산수화의 모태이자 조선시대 회화 전통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금강산도의 유래
금강산은 풍악(楓嶽), 개골(皆骨), 봉래(蓬萊), 기달(棋怛), 중향성(衆香城), 상악(霜嶽), 선산(仙山), 해악(海嶽)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를 역사적으로 분류해보면 13세기까지는 금강산 봉우리들이 모두 뼈를 드러낸 것 같다는 개골과 단풍이 아름다운 산이라는 풍악, 즉 산세를 형상화한 두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다.
불교 용어인 금강이란 명칭이 나타난 최초의 기록은 14세기에 최치원(崔致遠)의 후예인 최해(崔瀣)가 「송승선지유금강산서(送僧禪智遊金剛山序)」에 “세상에서 풍악이라고 불리는 이 산을 중의 무리들은 금강산이라고 부른다.”고 쓴 것이다. 불교 경전인 『화엄경(華嚴經)』「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는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로도 불리는 법기보살의 상주처가 금강산으로서 그 권속과 여러 보살 1,200인이 함께 머무르며 설법을 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는데, 14세기 중엽이 되자 금강산은 기이하고 일만이천봉의 수많은 봉우리와 더불어 실제 불교 경전에 나오는 성지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후 금강산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고 불교적 명칭인 기달, 중향성 등도 함께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대부들은 불교적 명칭인 금강을 피하려고 풍악, 봉래 등의 명칭을 주로 사용하면서 금강산 기행문과 기행첩의 제목을 동유기(東遊記), 풍악첩(楓嶽帖) 등으로 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남효온(南孝溫)이 지은「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금강산이라고 불린 지 하도 오래되어 갑자기 바꾸기 힘들어 나도 금강이라고 하겠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도 금강산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금강산은 전통적인 신선 사상과 함께 신선이 사는 산인 선산(仙山)으로 불렸는데, 16세기부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2) 제작 배경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산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산천숭배의 전통을 바탕으로 공자(孔子)의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요수요산(樂水樂山) 사상이 유행하였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산수 유람을 하면서 이를 소재로 시를 짓거나 글을 남기는 일이 기본 소양이 되었고 기행 시집과 기행 산문이 유행하였다. 개인적 체험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사회화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방 안에 누워서 산천을 유람하는 ‘와유(臥遊)’를 바탕으로 쓴 와유록 등도 발간되었다. 이들 기행문학들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소재는 금강산이었다.
금강산도는 ‘경치를 그린다’ 또는 ‘경치를 쓴다’라는 의미의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로 제작되었는데 시화일치(詩畵一致) 사상이 정착된 고려말기 기행 산문의 유행에 힘입어 그림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변천
(1) 고려말기∼조선초기
현존하는 작품과 기록을 보면 금강산도는 고려말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금강산은 이미 중국에까지 담무갈보살이 머무는 불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원나라 황실은 금강산의 여러 사찰을 원찰(願刹)로 삼았다. 최초의 기록은 1304년(고려 충렬왕 30)에 친원파 인물이었던 송균(宋均)이 금강산도를 가지고 원나라에 간 것이다. 이 시기 그려진 금강산도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노영(魯英)이 1307년(고려 충렬왕 33)에 그린 「담무갈보살예배도(曇無竭菩薩禮拜圖)」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당시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조선초까지 금강산도는 중국 황실이나 사신들의 요청에 의한 선물로 제작되었다. 명의 사신들은 황제와 자신들을 위한 금강산 그림을 요청하였으며 황제에게 올리는 금강산도는 비단에 옥축(玉軸)으로 표구되었다(『예종실록』 1년 4월 27일). 왕실의 명에 따라 당시 최고의 화원들인 안귀생(安貴生), 배련(裴連) 등이 그렸으며 일만이천봉을 한 화폭에 담은 전경도(全景圖) 형식이었다.
조선초기 금강산도 제작은 명승지에 대한 공경과 불교적 예배도(禮拜圖)의 성격을 띠었다.
(2) 조선중기
조선중기에 금강산 그림은 문인 화가들의 금강산 기행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17세기를 전후해 김제(金禔), 이경윤(李慶胤), 이영윤(李英胤), 이정(李霆), 조속(趙涑) 등의 사대부 화가들이 일반 감상용으로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문인 화가들은 자신들의 기행 중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여러 장면에 나누어 그리는 화첩(畵帖) 형태의 금강산도를 제작하였다. 조속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닐 수 없기 때문에 몸소 다니면서 본 것은 폭마다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며 오랫동안 전통으로 이어져온 전도식(全圖式) 표현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였다.
문인들은 금강산과 관동 지역을 여행하면서 기행문과 시를 짓고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를 첨가한 시·서·화 합벽첩(合璧帖)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형식의 기행사경도는 18세기 진경산수화 유행의 발판이 되었다.
(3) 조선후기
18세기 들어와 금강산도는 진경산수화풍의 중요한 화목이 되었으며 시기에 따라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8세기 전반으로 정선(鄭敾)에 의해 진경산수화가 정립된 시기이다. 당시 정선과 교유했던 김창흡(金昌翕), 김창협(金昌協), 이병연(李秉淵) 등은 현실적인 소재와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는 천기론적(天機論的)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국토에 대한 탐구와 새로운 화풍인 남종화풍(南宗畫風)을 수용한 진경산수화를 탄생시켰다. 정선은 1712년(숙종 38)과 1747년(영조 23)에 2차례 금강산 기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기행을 바탕으로 한 화첩 형식의 금강산도와 함께 전통적으로 내려온 금강전도를 제작하였다. 대상의 단순화와 재구성, 빽빽한 공간 운영, 활력 넘치는 필묵법, 정선 특유의 소나무 표현, 입체감이 돋보이는 미점(米點) 등은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두 번째 시기는 18세기 중엽으로 심사정(沈師正), 강세황(姜世晃), 이인상(李麟祥),정수영(鄭遂榮) 등 문인 화가들이 당파와 지역을 초월하여 진경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전반 진경산수화는 노론(老論)을 중심으로 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문예관이 제작 배경이 되었으며 기호남인(畿湖南人) 계열의 문인 화가들은 진경산수화를 그리지 않았다. 문인이었던 윤두서(尹斗緖), 정선과 막역한 교유 관계를 유지했던 조영석(趙榮祏) 등이 다양한 화목을 다루면서도 진경산수화는 그리지 않은 것이 그 예이다. 이 시기가 되자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 화가들이 남종화풍을 토대로 한 사의적(寫意的)인 화풍의 금강산도를 그렸다. 그들은 남종화의 화의(畵意)와 기법을 추구하였으며, 아취가 넘치는 표현을 중시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18세기 말 이후 19세기 전반기로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사실적 화풍의 금강산도가 유행하였다. 김홍도는 1788년(정조 12)에 정조의 명을 받고 선배 화원인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관동팔경, 금강산, 설악산 지역을 돌아본 뒤 그림을 그려 바쳤다. 이러한 봉명사경(奉命寫景)을 통해 그려진 금강산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사실적인 화법으로 그려졌다. 김홍도는 서양화의 개념과 기법을 적용하여 명암을 이용한 입체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였다.
(4) 조선말기 이후
19세기 후반 금강산도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금강산도는 서민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민화와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또한 김하종(金夏鍾), 이풍익(李豐瀷), 조정규(趙廷奎), 김영(金瑛) 등 여러 화가들은 김홍도의 금강산도 화풍을 모방하면서 당대의 취향에 적합한 금강산도를 그렸다.
20세기에 와서 금강산도가 궁중 벽화로 그려진 것은 금강산도 저변화의 영향이었다. 1920년(순종 13)에 순종은 화재로 재건한 창덕궁 희정당에 관동의 총석정과 금강산의 만물상을 벽화로 그릴 것을 명하였다. 김규진(金圭鎭)은 청록 기법을 동원하여 화려하고 정교하며 궁중 취향에 맞는 금강산 벽화를 그렸다.
이후 20세기 전반 안중식(安中植), 변관식(卞寬植), 노수현(盧壽鉉), 이상범(李象範) 등 근대 화단을 이끌어간 화가들도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참고문헌
- 『화엄경(華嚴經)』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박은순, 『금강산도연구』, 일지사, 1997.
- 유홍준 엮음, 『금강산』, 학고재, 1998.
- 유준영, 「겸재정선의 금강산도」, 『고문화』 18,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8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