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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5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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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방조 |
한글표제 | 송방조 |
한자표제 | 宋邦祚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영숙(永叔) |
호 | 습정(習靜)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7년(명종22) |
사망 | 1618년(광해군10) |
본관 | 은진(恩津) |
주거지 | 충청도 회덕(懷德) 송촌(宋村) |
묘소소재지 | 충청도 영동(永同) 기장리(耆藏里) |
증조부 | 송세량(宋世良) |
조부 | 송귀수(宋龜壽) |
부 | 송응기(宋應期) |
모_외조 |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윤경(李潤慶)의 딸 →(자녀)5남 |
형제 | (동생)송갑조(宋甲祚) |
처_장인 | 진주정씨(晋州鄭氏): 정곡(鄭谷)의 딸 →(자녀)4남 2녀 |
자녀 | (1자)송시영(宋時英) (2자)송시형(宋時瑩) (3자)송시염(宋時琰) (4자)송시담(宋時倓) (1녀)김자련(金自鍊)의 처 (2녀)윤장경(尹長卿)의 처 |
저술문집 | 『습정집(習靜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방조(宋邦祚) |
총론
[1567년(명종22)∼1618년(광해군10) = 52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영숙(永叔), 호는 습정(習靜)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영동(永同)으로 피난하였다. 아버지는 의빈부 도사(都事)송응기(宋應期)이고,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판서이윤경(李潤慶)의 딸이다. 봉사(奉事)송귀수(宋龜壽)의 손자이고,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백부이다. 중봉(重峯)조헌(趙憲)의 문인(門人)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0년(선조2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 1592(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들과 같이 영동으로 피난갔다. 영동현감한명윤(韓明胤)이 의병(義兵)을 소집하였는데, 그가 대부분 일을 계획하고 격문(檄文)도 썼다. 40세이던 1606년(선조39)에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고 훈련원 도감랑(都監郞)을 겸임하여 오영(五營)의 병력을 관할하였으며, 저작(著作)을 거쳐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어, 향시(鄕試)의 고시관으로서 영남(嶺南) 지방에 나갔다가 다시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에 임명되었다. 1613년(광해군5) 병조 좌랑이 되었는데,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정승조정(趙挺)의 아들 이조 좌랑조유도(趙有道)가 사명(使命)을 띠고 지방으로 나갔다가 국법을 범하자, 송방조가 바로 그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중상모략을 받고 함경도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어 3년간 극변(極邊)에서 고생하였다. 임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들과 함부로 교제하지 않고, 스스로 호를 ‘습정(習靜)’이라 하면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다.
유장(儒將)으로서 활동
1617년(광해군9) 비변사의 천거로 황해도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국가 재정(財政)이 궁핍해지자, 각 지역에 조도사(調度使)를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제할 만한 유장(儒將)을 조도사로 임명하였다. 송방조는 극력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부임하여, 일을 잘 처리하니 조운이 원활히 이루어졌다.
1618년(광해군10)에는 역시 유장으로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에 임명되었다. 당시 후금(後金)이 명(明)나라와 조선을 위협하자 명나라에서 후금의 누르하치를 정벌하려고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여 만주의 여진족을 앞뒤에서 협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므로 서북쪽 변경의 방어를 맡은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의 보좌관으로 지략이 있는 유장(儒將)이 필요하였으나 아무도 기꺼이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변사에서 그가 재목이 될 만하다고 추천하였는데, 그것은 명분에 불과하고 실은 반대파 한찬남(韓纘男) 등이 송방조를 미워하여, 그를 평안도평사로 삼아서 죽음의 땅으로 내몬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해 송방조는 은화(銀貨)를 중국으로 몰래 가지고 나가는 이들을 수색하는 어사(御史)에 임명되었다. 5월에 의주(義州)에서, 명나라로 들어가는 보빙사(報聘使) 일행의 짐을 검색하다가, 은화를 숨긴 역관들을 적발했다. 이들을 결박해 두고, 1618년(광해군10) 5월 25일 용천관(龍川館)에서 식사를 하다가 가슴이 답답하여 갑자기 쓰러져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52세였다. 당시 역관(譯官)들이 모의하여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으므로, 택당(澤堂)이식(李植)은, “그는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직설(直說)하였다.
저서로는『습정집(習靜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송방조의 풍모는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이 송시열에게 한 말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장생은 “평사(評事)로 있던 너의 숙부를 내가 일찍이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한 번은 장유(張維)를 보고, ‘그대가 아는 사람 중에서 누가 일류 명사(名士)에 속하는가?’ 하고 물으니, 장유가 ‘소생이 본 바로는 송방조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뒤에 1606년(선조39) 송방조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나를 찾아왔는데, 그의 생김새를 보고 담론(談論)을 들으니, 장유가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음을 내가 알았다.”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송방조가 송시열 선대 5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었기에 매우 존경하였고, 그가 피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나라의 큰 재목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처음에 충청도 영동 기장리(耆藏里)에 있었으나, 나중에 송시열이 충청도 청주(淸州) 마암리(馬巖里)의 선영으로 옮겼다. 그와 친한 친구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진주정씨(晋州鄭氏)는 군자감(軍資監)정(正)정곡(鄭谷)의 딸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송시영(宋時英)은 사복시 주부(主簿)가 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江華島)를 지키다가 순직(殉職)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훈되었다. 이 공으로 아버지 송방조도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차남 송시형(宋時瑩)은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었다. 1665년(현종6) 충청도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맏아들 송시영과 함께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습정집(習靜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청음집(淸陰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사계유고(沙溪遺稿)』
- 『서계집(西溪集)』
- 『계곡집(谿谷集)』
- 『기옹만필(畸翁漫筆)』
- 『사계전서(沙溪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간이집(簡易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기암집(畸庵集)』
- 『중봉집(重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