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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3 판




총론

[1561년(명종 16)~1608년(광해군 즉위) = 미상].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이름이 박명현(朴名賢)인데, 박명현(朴命賢)·박명현(朴明賢)으로 쓰기도 한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박원형(朴元亨)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박근(朴近)이고, 형은 박영현(朴英賢)과 박제현(朴濟賢)이다. 아들은 박흥인(朴興仁)인데, 아명이 박몽동(朴蒙同)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증광시(增廣試)무과(武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무장(武將)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8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별장(別將)으로서 방어사(防禦使)김응서(金應瑞) 등과 용강(龍岡)·삼화(三和)·증산(甑山)·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屯)에 배치하고 평양의 서쪽을 압박하며 때로 열세한 적을 소탕하면서 성 밖까지 이르렀다. 그 뒤 평양에서 적과 싸워 경성(京城)까지 추격하였다. 토포사(討捕使)·우후(虞侯)·호군(護軍)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후인 1596년(선조 29) 7월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홍성(洪城)으로 진격하자, 그 근처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다가 병력을 거느리고 홍주성(洪州城)으로 들어가 목사(牧使)홍가신(洪可臣)과 협력하고, 성 밖의 군사들과 연락하여 내외 협공의 태세를 취하였다. 이몽학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자 무장 임득의(林得義)와 함께 청양까지 추격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등을 지내면서 호서·호남 일대에서 전공을 세웠다. 1604년(선조 37) 6월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二等)에 녹훈되고, 연창군(延昌君)에 봉하여졌으며, 위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608년(광해군 즉위) 무장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잡혀 문초를 받던 중 물고(物故)되었고, 그 해 11월 공신녹권(功臣錄券)에서도 삭제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기축증광용호방목(己丑增廣龍虎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산집(芝山集)』
  • 『서애집(西厓集)』
  • 『백사집(白沙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난중잡록(亂中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