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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2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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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문경동 |
한글표제 | 문경동 |
한자표제 | 文敬仝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연산군~중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흠지(欽之) |
호 | 창계(滄溪)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57년(세조3) |
사망 | 1521년(중종16) |
본관 | 감천(甘泉) |
주거지 | 경상도 안동(安東) 감천(甘泉)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영주(榮州) 말암리(末巖里) 석봉(石峯) |
증조부 | 문숙기(文淑器) |
조부 | 문손관(文孫貫) |
부 | 문속명(文續命) |
모_외조 | 풍기진씨(豊基秦氏): 진유경(秦有經)의 딸 |
처_장인 | 평해황씨(平海黃氏): 황태손(黃兌孫)의 딸 →(자녀)2녀 |
자녀 | (1녀)허찬(許瓚)의 처 (2녀)장응신(張應臣)의 처 |
저술문집 | 『창계시고(滄溪詩槀)』, 『창계문집(滄溪文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문경동(文敬仝) |
총론
[1457년(세조3)∼1521년(중종16) = 65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자는 흠지(欽之), 호는 창계(滄溪)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의 감천(甘泉)이고, 세거지도 안동 감천이다. 아버지는 전연사(典涓司)직장(直長)문속명(文續命)이고, 어머니 풍기진씨(豊基秦氏)는 강순부(江順府) 소윤(少尹)진유경(秦有經)의 딸이다. 안동판관(安東判官)문손관(文孫貫)의 손자이고,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처외조부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86년(성종17)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여러 참하(參下)의 관직을 거쳐,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나갔다.
1506년(중종1)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가, 종부시 첨정(僉正)으로 승진하여,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고,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8년(중종3) 외직으로 나가서 경상도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었는데, 1510년(중종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유담년(柳聃年) · 경상좌도 수사(慶尙左道水使)김현손(金賢孫)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그때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에 거주하던 항거왜인(恒居倭人: 장기간 체류하는 일본인) 2백여 명이 왜관(倭館)을 탈출하여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므로, 그는 양산군의 병사를 거느리고 우후(虞候) 이반(李盼)의 군사와 힘을 합쳐서 이를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내직으로 들어와서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진급하였다. 1512년(중종7) 예천군수(醴泉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세금을 무겁게 거두고 향시(鄕試)의 시관(試官)으로서 예천 유생(儒生)들을 거느리고 시험장에서 난동을 부렸다고 파직되었다. 몇 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다가,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여, 1518년(중종13) 정선군수(旌善郡守)가 되었다. 1521년(중종16) 청풍군수(淸風郡守)가 되었는데, 봄에 부임하여 여름에 고을 관아(官衙)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6월 29일 죽으니, 향년이 65세였다. 사자(嗣子)가 없어서 아우 몇 사람이 관을 운반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창계시고(滄溪詩槀)』와 『창계문집(滄溪文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문경동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사람 됨됨이나 모습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허심탄회하고 관대하며 활달하여 언행에 구속됨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 조금도 경계를 하지 않고 거리낌 없는 말과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대했다. 그는 세상일에 별로 유념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에게 물정에 어두운 사람으로 비춰져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파직을 당하고 평생 그의 벼슬길이 가로막혔으나,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문장을 잘 지었는데, 특히 사부(詞賦)에 뛰어났다. 그는 응시하는 과거 시험마다 과장(科場)에서 언제나 일등을 차지하였으므로, 과거를 준비하는 후학(後學)들이 다투어 그의 문장을 모방하였다. 그는 마음에 맞는 문인(文人)이나 묵객(墨客)을 만나서 흥이 나면, 마치 곁에 다른 사람은 없는 듯 취하여 우스갯소리를 곧잘 하고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그러므로 겉치레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으나, 한 시대의 명망이 있는 인사들과 교유(交遊)하였다.
1510년(중종5) 동래현령(東萊縣令)윤인복(尹仁復)이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소우모리치카(宗盛親)에게 회답한 글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 그 문장이 훌륭한 데에 모두 탄복하였다. <삼포왜란(三浦倭亂)>이 평정된 뒤에 비로소 그 글을 윤인복이 아니라 양산군수문경동이 지었다는 것을 알고 모두 놀랐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영주(榮州) 말암리(末巖里) 석봉(石峯)의 동쪽에 있으며, 외손서 퇴계이황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퇴계집(退溪集)』 권46) 부인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건공장군(建功將軍)황태손(黃兌孫)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두었다. 맏딸은 진사(進士)허찬(許瓚)의 처가 되었는데, 그 맏사위가 퇴계이황(李滉)이고, 둘째 사위가 충의위(忠義衛) 김진(金震)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창계시고(滄溪詩槀)』
- 『창계문집(滄溪文集)』
- 『퇴계집(退溪集)』
- 『충재집(冲齋集)』
- 『눌은집(訥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