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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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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성 |
한글표제 | 민성 |
한자표제 | 閔垶 |
분야 | 학자, 교육·언론인/유일, 사회운동가/의사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재만(載萬) |
호 | 용암(龍巖) |
봉작 | 여흥군(驪興君) |
시호 | 충민(忠愍)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86년(선조19) |
사망 | 1637년(인조25) 1월 23일 |
본관 | 여흥(驪興) |
주거지 | 경기도 통진(通津) 봉상리(鳳翔里) |
묘소소재지 | 강화도 |
증조부 | 민종윤(閔宗胤) |
조부 | 민사권(閔思權) |
부 | 민인백(閔仁伯) |
모_외조 | 정씨(鄭氏): 정희린(鄭姬鄰)의 딸 |
자녀 | (1자)민지박(閔之釙) (2자)민지옥(閔之鈺) (3자)민지학(閔之釛) (4자)민지익(閔之釴) (1녀)최여준(崔汝峻)의 처 |
저술문집 | 『용암실기(龍巖實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성(閔垶) |
총론
[1586년(선조19)∼1637년(인조15) = 52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유일(遺逸). 자는 재만(載萬), 호는 용암(龍巖)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통진(通津) 봉상리(鳳翔里)이다. 아버지는 여양군(驪陽君)민인백(閔仁伯)이고, 어머니 정씨(鄭氏)는 현령정희린(鄭姬鄰)의 딸이다. 중추원 동지사민인전(閔仁佺)의 조카이고, 수사(水使)민선(閔墡)의 4촌 형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순절
호조 판서민인백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민성(閔垶)은 여러 번 과거 시험에 실패하여, 과거 보는 일을 포기하였다. 10대조인 민유(閔愉)가 살던 경기도 통진(通津)의 봉상리(鳳翔里)에 나가서 살았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궁중의 비빈(妃嬪)과 왕자 · 공주 등이 강화도로 피난하였고 백성들이 이들을 따랐다. 그가 살던 지역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피난민을 보고, 가족들과 상의하여 아들 3형제 내외와 딸 4형제 등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강화도에 들어가서 그는 세 아들과 함께 강화도 의병(義兵)에 들어가서 관군과 함께 강화성을 지켰다.
그러나 1637년(인조15) 정월 21일 강화유수(江華留守)장신(張紳)이 이끌던 관군이 청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강화성이 함락되었다. 유수와 관군뿐만 아니라 의병 대장마저 도망쳐버려, 사태를 수습할 방법이 없자, 일부 사람들은 배를 얻어 타고 가까운 섬으로 도망하였다. 그때 민성의 가족들이 강화도를 버리고 도망가자고 권하였으나 그는 “사대부가 의병으로 나섰는데 일이 급하다고 먼저 달아나서야 되겠는가? 살기를 바라면 요행히 죽음을 면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원손(元孫: 소현세자의 아들)은 겨우 섬을 빠져 나갔으나 강화에 있던 왕후와 비빈, 중신들은 청나라 군사의 포로가 되었다. 청나라 군사들이 노략질을 하고 부녀자들을 약탈하자, 그는 며느리와 딸들이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가지 않도록 하려고 전 가족이 함께 자결(自決)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세 아들을 돌아보면서 “행재소(行在所)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또 강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는데, 내 어찌 구차하게 살겠는가?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는 오직 정결한 곳에서 조용히 죽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전등사(傳燈寺) 곁에 조그만 흙집[土宇]을 찾아내어 그곳에서 아들 민지박(閔之釙) · 민지흑(閔之釛) · 민지익(閔之釴)과 며느리 이씨(李氏) · 김씨(金氏) · 유씨(柳氏)와 장녀 최여준(崔垶峻)의 아내, 미혼인 딸 셋, 첩 우씨(禹氏) 등과 함께 같은 날 목을 매어 순절(殉節)하였다. 자결하기 전에, 고령의 서출 누이와 어린 아이들은 도망시켰다. 그러나 서출 누이는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현장으로 달려가서 함께 자결하였다. 1637년에 1월 23일 전 가족이 모두 순절할 때, 그는 52세였고, 아들 · 딸과 첩은 2, 30대였다. 당시 강화도에서 절의를 지키다가 순절한 집안이 많았으나, 민씨(閔氏) 일가처럼 전 가족이 모두 죽은 집안은 드물었다. 그때 둘째 아들 민지옥(閔之鈺)과 맏손자 민홍(閔洚)은 다른 곳으로 피난갔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의 유고를 모은 『용암실기(龍巖實記)』가 남아 있다.
후손과 추모
그의 유언으로 순절한 다음에 종들이 강화도 전등사 아래 흙집을 허물어 13인 가족을 함께 묻었다. 송시열(宋時烈)은 그 제자 민유중(閔維重: 인현왕후 아버지)의 부탁으로 「용암전(龍巖傳)」을 지어서 그들이 순절한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자녀는 4남 4녀인데, 장자는 민지박, 차자는 민지옥, 3자는 민지학, 4자는 민지익이고, 최여준의 처가 된 맏딸과 미혼인 딸 셋이 있다. 죽은 뒤에 여흥군(驪興君)에 추봉되고,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정에서 민성과 그의 자녀, 며느리 그리고 첩까지 모두 12명을 정문(旌門)하였으나, 뒤따라 죽은 서출 누이는 제외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재전서(弘齋全書)』
- 『송곡집(松谷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우재집(迂齋集)』
- 『몽와집(夢窩集)』
- 『도암집(陶菴集)』
- 『강한집(江漢集)』
- 『풍서집(豐墅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