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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흥국사|한글표제=흥국사|한자표제=興國寺|대역어=|상위어=원당(願堂)|하위어=|동의어=|관련어=관단(官檀), 기우제(祈雨祭), 초문사(肖門寺), 팔관재(八關齋), 화엄경도량[華嚴經道場], 강감찬(姜邯瓚)|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개성시 만월동 고려왕궁 만월대 동남쪽 일대|시대=|왕대=|집필자=이종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7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7021_002 『정조실록』 20년 7월 21일]}}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의 원당이었던, 경기도 수락산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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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의 대표적인 원당이었던 개성의 절.
  
 
=='''개설'''==
 
=='''개설'''==
  
흥국사(興國寺)는 경기도 남양주시수락산(水落山)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원광(圓光)이 창건한 수락사(水落寺)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으로 지정되며 흥덕사(興德寺)라 하였고, 민간에서는 덕절[德寺]이라고 했다. 인조 때 절을 중건하고 이름을 흥국사(興國寺)라 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정조 때 흥국사는 승려의 감독기관인 오규정소(五糾正所)로 지정되며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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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왕실의 대표적 원당이었던 흥국사(興國寺)는 승려들이 공식적으로 수계를 받는 관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팔관재, 기우제, 화엄경도량 등이 설행되었던 사찰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던 시기에 흥국사 불상에서 여러 차례 땀이 흘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후 개경의 쇠락과 더불어 흥국사도 폐사되었다.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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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변천'''==
  
흥국사는 창건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조선초기까지 절의 연혁을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다. 다만 조선초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이 절을 유람하면서 지은 「수락사」라는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주목(楊州牧) 불우(佛宇)조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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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건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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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흥국사는 고려 왕실의 대표적 [[원당(願堂)]] 가운데 하나였다. 흥국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해동고승전』에서는 고구려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으로부터 온 순도(順道)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고 그가 머물 수 있도록 375년(고구려 소수림왕 5)에 초문사(肖門寺)를 지어주었는데 이 사찰이 바로 흥국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연(一然)은 『삼국유사』「흥법편」에서 "당시 고구려 수도가 압록강 북쪽에 있던 안시성(安市城)이기 때문에 개성의 흥국사를 초문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 「왕력편」에서 "고려 태조가 924년(고려 태조 7)에 흥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1)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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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시대
  
선조는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1568년(선조 1)에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묘()를 수락사의 남쪽으로 이장하였다. 선조는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 가까이에 있는 수락사를 크게 복원하여 원당으로 삼고 흥덕사(興德寺)란 이름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민간에서는 흥덕사를 덕절이라 불렀다. 박한영(朴漢永)은 「흥국사기적비」에서 선조 원년에 덕흥대원군의 무덤 때문에 칙명으로 행향원당(行香願堂)을 삼고 흥덕사라 사액하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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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승려에게 구족계(具足戒)를 주는 관단(官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초 적연국사(寂然國師)영준(英俊)이 946년(고려 정종 1)에 흥국사의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각종 제례가 행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흥국사에서 팔관재(八關齋), [[기우제(祈雨祭)]], 화엄경도량(華嚴經道場) 등을 개설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흥국사는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에 왕과 신하들이 자주 찾았으며 여러 정치적 사건들이 벌이진 곳이기도 했다. 1198년(고려 신종 즉위) 5월에는 사동(私僮) 만적(萬積) 등이 흥국사에 모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가 실패하였고, 1299년(고려 충렬왕 25)에는 임금이 흥국사에서 죄인들을 국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1389년 11월(고려 창왕 1)에는 정몽주, 정도전 등이 흥국사에 모여 창왕(昌王)의 폐위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1626년(인조 4)에 절을 중건하고 현재의 이름인 흥국사(興國寺)로 고쳤다. 하지만 이름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덕절 내지 덕사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에서도 흥국사는 덕사(德寺)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데, 1682년(숙종 8) 영운령(靈雲令) 이의천(李義天)과 운흥수(雲興守) 이절(李梲)이 덕사(德寺)에서 술 취해 소란을 피워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802025_002 『숙종실록』 8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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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시대
  
흥국사는 1790년(정조 14) 봉은사(奉恩寺), 봉선사(奉先寺), 용주사(龍珠寺), 백련사(白蓮寺) 등과 함께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한 사찰로 선정되었다. 오규정소는 조선시대의 승려 감독기관으로 중기 이후 승려의 기강을 바로잡고, 승풍(僧風)을 규찰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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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된 이후 흥국사와 관련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불상에서 땀을 흘렸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이는 태조대에 2회, 정종대에 4회, 태종대에 2회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1394년(태조 3) 11월, 1399년(정종 1) 10월의 3회, 1400년(정종 2) 1월, 1403년(태종 3) 12월, 1404년(태종 4) 7월의 기록에서는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1395년(태조 4)과 7월과 1409년(태종 9) 10월의 기사에서는 "[[유후사(留後司)]]의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고 하였다. 유후사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개성을 통치하던 지방 행정 관청이었다. 그러므로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흐른 것은 한양 천도와 관련한 여러 사건들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건국 이후 1394년(태조 3) 10월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1399년(정종 1) 3월에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405년(태종 5) 10월에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한양으로 확정한 이후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서 흥국사 불상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793년(정조 17) 왕실의 시주를 받아 기허(騎虛)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818년(순조 18) 요사채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4년 후에 왕명에 따라 기허가 대웅전과 법당 등을 중건했다. 1856년(철종 7) 은봉(隱峰)이 육면각(六面閣)을 중수하고 단청하였으며, 1870년(고종 7)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였다. 1878년(고종 15)에 소실된 절을 용암(庸庵)이 중건하였다. 1888년 제암(濟庵)이 시주금을 모아 영산전(靈山殿)을 건립하였고, 요사채를 중수하여 단청불사를 하였다. 이후 신도 강재희의 시주로 각 법당의 기와를 교체하였고, 대웅전 3존상의 개금불사를 했다. 1917년에는 주지 박범화(朴梵華) 스님이 각 전각을 중수하였는데, 그는 1938년 임종시에 양주와 고성의 전답 33,643평을 사중에 기부하여 사세를 확장하도록 하였다. 1940년에는 주지 한월우경(漢月宇炅)과 화주 진우종호(振宇鐘浩)가 만일회(萬日會) 정토법문(淨土法門)을 개설하고 정재를 모아 각 전각을 수리하고 사내 사실(私室)을 모두 공유화(公有化)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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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는 조선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후 퇴락하기 시작하여 조선전기에 이미 폐사되었던 것 같다. 조선전기의 문신 남효온(南孝溫)은 개성을 유람하고 쓴 「송경록(松京錄)」에서 ‘흥국사 옛터[興國寺故墟]’라고 표현하였으므로 이때는 이미 폐사되었을 것이다. 흥국사에는 고려전기 강감찬(姜邯瓚)이 조성한 석탑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1748년(영조 24)에 흥국사 터에 있는 석탑의 탑신에 "보살계 제자인 평장사강감찬이 나라가 영원히 태평하고 주변국도 안정되기를 기원하며 공경히 탑을 조성하여 영원히 공양에 충당한다. 1021년(고려 현종 12) 5월 어느 날[菩薩戒子弟 平章事姜邯瓚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時天禧五年五月日也]"이라는 38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대 예조 판서민종현(閔鍾顯)이 1796년(영조 20) 7월에 왕에게 보고하기를, 개성 흥국사의 옛터에 있는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는데 강감찬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7021_002 『정조실록』 20년 7월 21일]). 현재 그 탑은 개성역사박물관 앞뜰에 세워져 있다.
 
 
흥국사는 근세 화승(畵僧)들의 본거지로 이름나, "덕절 중은 불 때면서 불막대로 시왕초를 그리고, 화계 중은 불 때면서 초할향(初喝香)을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2) 근현대
 
 
 
일제시기인 1917년에 주지 범화(梵華)가 전각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기와를 교체하고 단청을 하였다. 절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 만월보전(滿月寶殿), 독성전(獨聖殿), 시왕전, 산신전(山神殿) 등이 있다.
 
 
 
현재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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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朴漢永, 「수락산흥국사기적비(水落山興國寺紀績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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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최완수, 『명찰순례』3, 대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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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김형우 , 『한국의 사찰』, 대한불교진흥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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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집(秋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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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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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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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6 판



고려 왕실의 대표적인 원당이었던 개성의 절.

개설

고려시대 왕실의 대표적 원당이었던 흥국사(興國寺)는 승려들이 공식적으로 수계를 받는 관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팔관재, 기우제, 화엄경도량 등이 설행되었던 사찰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던 시기에 흥국사 불상에서 여러 차례 땀이 흘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후 개경의 쇠락과 더불어 흥국사도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개성 흥국사는 고려 왕실의 대표적 원당(願堂) 가운데 하나였다. 흥국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해동고승전』에서는 고구려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으로부터 온 순도(順道)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고 그가 머물 수 있도록 375년(고구려 소수림왕 5)에 초문사(肖門寺)를 지어주었는데 이 사찰이 바로 흥국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연(一然)은 『삼국유사』「흥법편」에서 "당시 고구려 수도가 압록강 북쪽에 있던 안시성(安市城)이기 때문에 개성의 흥국사를 초문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 「왕력편」에서 "고려 태조가 924년(고려 태조 7)에 흥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2) 고려시대

흥국사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승려에게 구족계(具足戒)를 주는 관단(官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초 적연국사(寂然國師)영준(英俊)이 946년(고려 정종 1)에 흥국사의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각종 제례가 행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흥국사에서 팔관재(八關齋), 기우제(祈雨祭), 화엄경도량(華嚴經道場) 등을 개설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흥국사는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에 왕과 신하들이 자주 찾았으며 여러 정치적 사건들이 벌이진 곳이기도 했다. 1198년(고려 신종 즉위) 5월에는 사동(私僮) 만적(萬積) 등이 흥국사에 모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가 실패하였고, 1299년(고려 충렬왕 25)에는 임금이 흥국사에서 죄인들을 국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1389년 11월(고려 창왕 1)에는 정몽주, 정도전 등이 흥국사에 모여 창왕(昌王)의 폐위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3) 조선시대

조선이 건국된 이후 흥국사와 관련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불상에서 땀을 흘렸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이는 태조대에 2회, 정종대에 4회, 태종대에 2회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1394년(태조 3) 11월, 1399년(정종 1) 10월의 3회, 1400년(정종 2) 1월, 1403년(태종 3) 12월, 1404년(태종 4) 7월의 기록에서는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1395년(태조 4)과 7월과 1409년(태종 9) 10월의 기사에서는 "유후사(留後司)의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고 하였다. 유후사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개성을 통치하던 지방 행정 관청이었다. 그러므로 흥국사 불상에서 땀이 흐른 것은 한양 천도와 관련한 여러 사건들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건국 이후 1394년(태조 3) 10월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1399년(정종 1) 3월에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405년(태종 5) 10월에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한양으로 확정한 이후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서 흥국사 불상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흥국사는 조선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후 퇴락하기 시작하여 조선전기에 이미 폐사되었던 것 같다. 조선전기의 문신 남효온(南孝溫)은 개성을 유람하고 쓴 「송경록(松京錄)」에서 ‘흥국사 옛터[興國寺故墟]’라고 표현하였으므로 이때는 이미 폐사되었을 것이다. 흥국사에는 고려전기 강감찬(姜邯瓚)이 조성한 석탑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1748년(영조 24)에 흥국사 터에 있는 석탑의 탑신에 "보살계 제자인 평장사강감찬이 나라가 영원히 태평하고 주변국도 안정되기를 기원하며 공경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히 공양에 충당한다. 1021년(고려 현종 12) 5월 어느 날[菩薩戒子弟 平章事姜邯瓚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時天禧五年五月日也]"이라는 38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대 예조 판서민종현(閔鍾顯)이 1796년(영조 20) 7월에 왕에게 보고하기를, 개성 흥국사의 옛터에 있는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는데 강감찬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정조실록』 20년 7월 21일). 현재 그 탑은 개성역사박물관 앞뜰에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 『삼국유사(三國遺事)』
  • 『해동역사(海東繹史)』
  • 『추강집(秋江集)』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