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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2 기준 최신판



집안이 변하여 나라가 됨.

개설

1388년(고려 우왕 14)에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후 우왕·창왕을 폐하고 자신의 뜻대로 인친(姻親)인 공양왕을 세웠다. 흥국사(興國寺)에서 9명이 회동하여 공양왕의 옹립을 천명할 때 이성계는 대규모 군사를 대동하였다. 공양왕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제거하려 한 정몽주를 이방원이 살해한 후,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정도전 등을 유배한 정몽주의 죄를 추궁할 때에도 후일의 정종인 이방과를 보내 공양왕을 압박하였다. 이는 사실상 군사력으로 위협하는 것이었고, 결국 공양왕을 굴복시켰다. 군사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성계는 1392년(태조 1)에 자신의 집안을 일으켜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내용 및 특징

이성계가 고려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왕과 조민수의 주도로 즉위한 창왕의 폐가입진(廢假立眞), 곧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운다고 선언하고 공양왕 옹립을 천명한 1389년(고려 창왕 1) 흥국사 회동은, 이성계와 그 외 유력자 8명이 모여 대병력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루어졌다[『태조실록』총서 100번째기사].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선언되는 자리에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무위(武威)를 과시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직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의 사주를 받아 조준·정도전 등을 유배하도록 한 대간들을 처벌하라는 요청을 거절한 공양왕에게 이방과를 보내어 정몽주의 죄를 따질 것과 그 무리들의 죄를 추궁할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공양왕의 굴복을 받아 내었다[『태조실록』총서 131번째기사]. 그리고 곧이어 ‘화가위국(化家爲國)’하였다. 이 모든 과정은 이성계 일파의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1398년에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인 무인지변(戊寅之變)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비록 혁파되기는 하였지만 오랫동안 사병(私兵)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400년(정종 2)에 이방간이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휘하에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방원은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이방간과 교전하였다. 조선의 건국과 무인지변, 제2차 왕자의 난인 방간지란(芳幹之亂), 그리고 두 차례의 난을 거쳐 태종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군사력이 그 바탕이 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변천

단종대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자신이 국정에 전권(專權)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한 사육신·생육신 무리를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영천위(鈴川尉)윤사로(尹師路)·신숙주(申叔舟)·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의 권고로 제거하여 종사(宗社)의 안위를 지켰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화가위국’한 것이라 하였다(『세조실록』 1년 8월 13일). 이때의 ‘화가위국’은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민현구, 「조선 태조대의 국정 운영과 군신 공치」, 『사총』6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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