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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1 기준 최신판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넓고 큰 기상을 지칭하는 맹자의 가르침.

개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맹자(孟子)가 한 말로, 단순한 육체적 기운이 아니고 의(義)와 도(道)에 합치되고, 특히 ‘의’가 쌓여서 생기는 것이다. 유학자라면 『맹자』를 애독하면서 호연지기를 자주 언급하는데 조선시대 많은 지식인 역시 수양을 통해 도의와 조화된 천지의 올바른 호연지기를 지향하였다.

내용 및 특징

호연지기는 맹자가 제자 공손추(公孫丑)에게 부동심(不動心)을 언급하면서 나온 말이다. 공손추가 호연지기를 묻자, 맹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서 그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꽉 차 있을 만큼 넓고 커서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기상인데 이는 의를 쌓아서 생겨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호연(浩然)은 성대히 유행하는 모양이고 기는 몸에 충만한 것이라 한다. 즉 몸에 충만한 기가 성대하게 활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변천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몸을 수양하여 호연지기를 길러 배양하려 하였다. 조선초기 김일자(金日孜) 등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 후학들에게 무궁한 배움의 길을 열어준 권근(權近)이 호연지기의 기상으로 이단을 배척한 면을 들어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다(『세종실록』 18년 5월 12일). 명종대에 호연지기는 사기(士氣)로 여겨졌다. 명종은 그러한 사기를 양성하면 진작되고 억제하여 꺾이게 하는 것은 객기(客氣)이므로, 항상 ‘직(直)’으로 호연지기를 배양해야 함을 말하였다(『명종실록』 1년 8월 4일). 그저 고담준론(高談峻論)만을 숭상하면 객기에 불과하므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특히 호연지기는 마음공부를 통해야 그 묘리(妙理)를 알 수 있기에 스스로 상도(常道)를 돌이켜 부끄러운 마음이 없도록 하였다(『명종실록』 3년 3월 22일). 홍문관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호연지기와 심성정(心性情)·리기(理氣)를 나누어 도표를 만들고 선유들의 설을 유별로 모아놓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송시열(宋時烈)은 천지 사이에 가득한 호연지기에 대한 공부를 임금의 성학(聖學)으로 삼았고(『숙종실록』 7년 3월 4일), 정조대에는 의(義)가 축적된 선유들의 말을 호연지기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맹자가 "천만 명이 앞에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고 한 말에서 호연지기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정조실록』 5년 3월 18일). 특히 정조는 학문하는 방법을 말하며, 직내방외(直內方外)의 공정을 터득해야 왕도를 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직내는 경(敬)으로 뜻을 견지하는 것 같은 것이고, 방외는 의(義)로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대왕 행장).

참고문헌

  • 『맹자(孟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