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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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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통신사행 |
한글표제 | 통신사행 |
한자표제 | 通信使行 |
상위어 | 사대교린(事大交隣), 선린외교(善隣外交), 조일관계(朝日關係) |
하위어 | 삼사(三使), 사문사(四文士), 일본사행록(日本使行錄), 필담창화록(筆談唱和錄), 역지통신(易地通信) |
동의어 | 조선국왕사(朝鮮國王使),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
관련어 |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문위행(問慰行), 부경사행(赴京使行)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일본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태조~순조 |
집필자 | 하우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통신사행(通信使行) |
조선에서 일본 막부의 장군에게 보낸 공식 사절단.
개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8세기 후반 이래 600여 년에 걸친 일본과의 국교 단절을 청산하고 일본의 족리막부(足利幕府)와 통교를 재개하고자 하였다. 일본에서도 1404년 족리의만(足利義滿, [아시카가 요시미쓰])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를 조선에 파견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체결되었다. 그 후 두 나라는 중앙정부간 사절을 교환하였는데, 일본의 막부에서 조선으로 보낸 사절을 일본국왕사, 조선에서 일본 막부에 보낸 사절을 통신사(通信使)라 하였다.
통신(通信)이라는 말은 ‘신의로써 통한다.’는 의미이다. 통신사는 외교 의례상 대등한 나라 사이에 파견하는 사절이다. 조선의 국왕 사절단이 일본의 막부 장군에게 파견된 것은 전기에 18회, 후기에 12회에 달하였다. 그런데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사절단은 전기에 8회, 후기에 9회였다.
내용 및 특징
1. 조선전기의 통신사행
조선전기 일본의 족리막부 장군 앞으로 파견된 사절은 18회에 이르며, 명칭도 통신관(通信官)·회례사(回禮使)·보빙사(報聘使)·통신사(通信使) 등 다양하였다. 특히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사절은 임진왜란 때까지 8회였다. 그런데 이 중 조난, 질병, 사고, 일본 해적 등으로 세조와 성종대의 3회는 파견되지 못하였다. 또 임진왜란 때 파견한 두 차례의 통신사는 성격이 달랐다.
따라서 실제 교토까지 가서 사명(使命)을 완수한 통신사행은 1428년(세종 10) 박서생(朴瑞生) 일행, 1439년(세종 21) 고득종(高得宗) 일행, 1443년(세종 25) 변효문(卞孝文) 일행 등 세 차례뿐이었다. 이처럼 조선전기의 통신사는 교류 시기도 짧았고, 사행 형태도 일정하지 않았다.
일본에 파견된 최초의 조선통신사는 1428년 무신통신사행(戊申通信使行)으로, 6대 장군 족리의교(足利義敎,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습직(襲職)을 축하하는 사절로 삼사(三使)가 모두 중앙 관리로 편성되었고, 왕의 서계와 예물을 지참하여 조선후기의 통신사와 동일한 형식을 띠었다. 이때부터 통신의 본래적 의미인 교린을 위한 신의가 강조되었다. 사명도 새 장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의례적 성격이 기본이었다.
2. 조선후기의 통신사행
통신사행이 정례화하고 체계화되는 때는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이다. 조선 정부는 덕천막부(德川幕府)에 12회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중 임진왜란 후 국교 재개기에 파견된 세 차례 사절단의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서 전후 처리를 위한 과도기적 사행이라고 할 수 있다. 1636년(인조 14)에 이르러 통신사란 명칭이 부활하였고, 이후 1811년(순조 11)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파견하였다. 그런데 회답사와 통신사는 모두 국서를 지참한 왕의 사절단이라는 점, 원역(員役)의 구성과 사행 노정 등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보통 합쳐서 12회의 통신사로 인정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파견된 것은 양국의 국내 정치적 동기와 국제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중국에서는 청이 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도 평화가 정착되자 통신사행이 지니는 본래의 정치적 의미는 점차 줄어들었다.
따라서 통신사행은 양국 간의 절실한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등의 긴박성이 없어지고 형식화·의례화되었다. 대신 문화 교류라는 부수적 기능이 부상하였다. 통신사행원들의 문화 교류 활동은 1655년(효종 6) 을미통신사행 때부터 시작되어 1682년(숙종 8) 임술통신사행 이래에는 아주 활발해졌다. 조선은 병자호란의 어려움 속에서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할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지만 명분상으로는 ‘교화(敎化)를 통한 평화 유지’를 내세워 문화 사절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3. 통신사행의 파견 절차와 노정
일본에서 덕천막부의 새 장군이 즉위하면 막부에서는 대마도에 알리고, 대마도주는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를 보내 조선에 알렸다. 이어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보내면 조선에서는 동래부와 예조, 그리고 비변사의 경로를 거쳐 논의하였다. 조정에서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면 부산의 왜관(倭館)을 통하여 대마도에 통보하였다. 그 후 대마도주는 통신사행의 도일(渡日) 절차와 여러 사항을 협의하기 위하여 통신사의정차왜(通信使議定差倭)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동래부에서는 역관과 외교 실무자들을 보내 왜관에서 일본 측과 협의하고, 통신사행에 관한 제반 사항을 규정하는 「통신사행강정절목(通信使行講定節目)」을 정하였다. 「통신사행강정절목」이 조정에 보고되면 조선에서는 통신사 일행의 구성과 예단 준비 등에 착수하였다. 한편 일본의 막부에서는 정승급 관리인 노중(老中)을 통신사 영접의 총책임자로 하는 기구를 설치하고, 통신사행이 통과하는 연로상의 각 번(藩)에서는 접대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창경궁에서 왕에게 사폐(辭陛)한 후 판교-용인-죽산-충주-문경-예천-안동-영천-경주-울산을 거쳐 동래부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대마도에서 미리 나온 통신사호행차왜(通信使護行差倭)의 안내를 받으면서 갔다. 기선(騎船) 3척과 복선(卜船) 3척 등 총 6척으로 구성된 통신사행 선단은 부산포의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지낸 다음 출항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부산포에서 대마도-일기도(壹岐島)-남도(藍島)-적간관(赤間關)-상관(上關)을 거쳐 뇌호(瀨戶) 내해(內海)의 겸예(鎌刈)-병포(鞆浦, [도모노우라])-우창(牛窓)-실진(室津)-병고(兵庫)-대판(大坂)까지의 수로를 거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족리막부가 있는 경도가 목적지였으나 후기에는 덕천막부의 소재지인 강호(江戶)까지 다시 육로로 갔다. 통신사행의 노정은 왕복 거리로 도합 11,500여 리에 달하였으며, 서울을 출발하여 귀국해 복명(復命)하기까지는 대개 8개월이 소요되는 대장정이었다. 대마도로부터 일본 본주를 왕래하는 행차에는 대마도주가 직접 호행하였으며, 수천 명의 대마도인이 수행하였다.
통신사 일행이 강호에 도착하면 막부 측에서는 노중이 통신사의 숙소까지 와서 영접하였고, 다시 덕천막부의 유력 친족 세력인 어삼가(御三家)가 주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조선 왕의 국서를 전달한 후의 연회에는 덕천막부의 장군이 직접 삼사에게 술을 권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쇄국 체제 하의 덕천막부의 시대에 유일하게 국교를 맺고 있었던 조선의 사절단 내빙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장군일대(將軍一代)의 성사(盛事)’였던 만큼 막부는 조선의 통신사행을 국빈으로 환영하였다. 한 차례의 통신사행을 접대하는 데 1,000,000냥이라는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었으며, 동원된 연인원이 33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부의 번에서는 통신사행의 접대를 위하여 6개월 전부터 일회용 객관을 신축하기도 하였다.
4. 통신사행의 사명
통신사행의 일차적인 사명은 덕천막부 장군의 습직을 축하하는 국서를 전하고 답서를 받아 오는 것이다. 그러나 통신사 파견의 실질적인 목적은 재침 방지를 위한 일본의 국정 탐색, 외교적 현안의 조정 및 해결이었다. 이와 함께 조선 정부는 문화적 교화를 통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순화한다는 내부적 목적도 있었다.
5. 통신사행의 구성과 성격
조선전기 통신사행의 경우 1479년(성종 10) 기해사행 때 예조에서 올린 「통신사사목」을 보면 삼사를 비롯한 필수 인원이 36명이고 배를 운행하는 격군(格軍)을 포함해 100명을 넘지 않았다. 이는 1460년(세조 6) 통신사 일행이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향하다 풍랑으로 조난을 당하여 사행이 무산되었을 때도 “삼사 등 100여 명이 3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였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문화 교류를 담당하는 인원이 거의 편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도 후기의 편성과는 구별된다.
조선후기의 경우에는 정사를 비롯하여 부사·종사관으로 구성되는 삼사, 역관·군관·제술관·양의(良醫)·사자관(寫字官)·의원·화원·서기(書記)·자제군관·별파진(別破陣)·전악(典樂)·이마(理馬)·소동(小童)·노자(奴子), 취수(吹手)와 각종 기수(旗手)를 비롯한 악대 및 의장대 일행, 사공과 격군 등 도합 450명에서 5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으로 편성되었다. 대인원이 편성된 이유는 해로로 이동하기 위하여 사공 및 격군이 300명, 악대 및 의장대를 담당하는 인원이 100명 정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역관 21명, 군관 17명, 하인과 노자 90명 등이 있었다.
통신사행의 원역 구성에서 특징적인 면모는 문화 교류를 담당하는 인원이 다수 편제되었다는 것이다. 시문 창수(唱酬)를 임무로 하였던 제술관과 3명의 서기, 양의 1명과 의원 2명, 사자관 2명, 화원 1명 등 문화 교류를 전담하는 인원이 별도로 10여 명이 편성되었다. 이 밖에도 악대와 의장대를 담당하는 인원이 100여 명 있었다. 이 점은 다른 사행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통신사행만의 특징이다. 또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행원을 선발할 때 문재(文才)와 기예에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았다. 영조가 1764년(영조 40) 계미통신사행 일행이 귀국하여 복명할 때 삼사와 사문사(四文士)에게 일본 문인과의 시문 창수에 관하여 질문을 했을 정도로 조선에서는 문화 교류에 관심을 기울였다.
변천
일본의 덕천막부가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통신사를 초청한 이유는 그만한 가치의 정치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하게 진행된 통신사행의 접대는 막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18세기 들어서는 막부의 관리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의 일각에서 일본에 불평등한 의례를 바꾸고 접대 경비를 절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통신사행의 정치적 의미가 줄어들자 경비 절감을 위해 대판이나 대마도에서 빙례(聘禮)를 하자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결국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행 이후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통신사의 파견이 몇 차례나 연기된 끝에 1811년(순조 11)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른바 역지통신(易地通信)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파행이고 변형된 형태로서 통신사행의 종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된 원인은 양국의 재정적 압박이라는 요인 외에 19세기에 들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국제 정세의 변화라는 요소가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조선 외교에 힘을 기울일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통신사를 초빙할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1811년 대마도 역지통신을 마지막으로 통신사행은 중지되었으며, 근세 400여 년간에 걸친 통신사 외교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의
통신사행은 본래 정치적 목적으로 파송되었지만, 동시에 경제적·문화적 의미 또한 부수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일본 막부가 주로 국내 정치적 동기를 중시하였다면, 조선 조정은 문화적 의미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통신사행을 통한 문화 교류의 사실은 통신사행원들이 저술한 일본 사행록 40여 종과 주로 일본인들에 의하여 편찬되고 간행된 200여 종의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쇄국 체제 하의 일본 사회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동시에 일본의 문물이 사행원들을 통하여 전해져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본 사회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811년 대마도에서의 역지통신을 마지막으로 통신사행이 폐지된 이후 양국 관계는 소원해지고 정보 불통에 따른 오해와 상호 인식의 격차가 커지면서 결국 분쟁과 전쟁으로 가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이 점에서는 조선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보아 통신사행이 지니는 의의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근대 이후 한일 양국의 관계가 침략과 저항이라는 불행한 역사로 점철되었고, 그러한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양 국민의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현실에서 근세 450여 년간에 걸쳐 전개되었던 선린 외교와 문화 교류는 앞으로 바람직한 한일 관계의 모델로서 재조명되고 적극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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