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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0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불사(佛事)에 필요한 재물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돌아다니며 시주를 권하던 승려.

개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고 사찰을 혁파하였다. 아울러 사찰에 소속된 전답과 노비를 압수하여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사치를 누리며 번성하던 불교계는 위기를 맞아 존립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계가 내놓은 자구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화주승(化主僧)이다. 전각과 불상을 중수하거나 신설하고, 각종 법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였다. 왕실과 부호 등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유명한 고찰(古刹)에만 해당하는 특별한 경우였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재물을 구하기 위해 원근을 마다하지 않고 곳곳으로 화주승을 내보냈다.

화주승은 민가를 돌아다니면서 목탁과 징 소리에 맞춰 염불을 외며 시주를 권하였다. 때로는 번화한 길거리에서 보따리를 펼쳐 놓고 시주를 구하기도 하였다. 화주승이 찾아오면, 부자는 물론이고 가난한 백성도 적은 곡식이나마 정성껏 시주하였다. 불교 신앙은 이미 천년 이상 계속되어 민족적 신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다양한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었다. 특히 사람들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따라, 절에 시주하는 것은 공덕을 쌓는 일이므로 수명과 건강, 자손의 성공에 보탬이 된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 사명당(四溟堂)유정(惟政)도 화주승이었던 적이 있었다. 사명당은 평창 월정사의 대웅전을 중수하기 위해 1587년(선조 20)부터 시주의 목적과 취지를 적은 권선문(勸善文)을 지니고 3년 동안 전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한 치의 베와 세 움큼의 곡식’을 얻어 마침내 중수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용 및 특징

화주승은 시주를 모은다는 뜻에서 시주승(施主僧)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사명당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화주승은 시주의 목적과 취지를 적은 권선문 또는 모연문(募緣文)을 보여 주고 시주의 공덕에 대해 설명하며 시주를 권하였다. 그리고 조금의 시주물이라도 받으면 축원(祝願) 기도를 올려 주었다. 이렇게 백성들에게서 조금씩 모은 재물로 법당을 중수하고 불상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불사가 완성되면 그 과정을 적은 중수기 또는 중수비, 불상의 복장(腹藏) 기록 등을 남겼는데, 중수기 등에는 반드시 시주자의 명단을 기록하여 그 공덕을 칭송하였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는 화주승에 관한 기록이 10여 차례 등장하는데, 대부분은 신하들이 화주승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금지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억불 정책의 담당자인 조정 신료들의 입장에서 볼 때 화주승은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헛되이 낭비하는,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449년(세종 31)에는 진관사(津寬寺)수륙사(水陸社)를 중수하기 위해 화주승들이 나섰다.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이들이 종친의 증명서를 받아 시주를 강권(强勸)하는 등의 민폐를 일으킨다며 이를 금지할 것과, 아울러 수륙사의 중수를 풍년 뒤로 미룰 것을 청하였다(『세종실록』 31년 5월 20일). 1451년(문종 1)에는 대자암(大慈庵)의 화주승 홍조(洪造)가 면포로 곡식을 사들이면서 제값을 치르지 않는 등 민폐를 많이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문(鞫問)한 뒤 처벌하였다(『문종실록』 1년 4월 13일). 홍조는 세종 연간에 흥천사의 화주승으로 경찬회 비용을 모집하던 인물이었다. 화주승은 사찰의 상시적인 직책이 아니며 필요할 때만 임시로 임용하였는데, 홍조의 경우처럼 전문적으로 활동하기도 한 듯하다.

1468년(세조 14)에는 화주승을 사칭한 인물들이 소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원각사(圓覺寺)불유(佛油)를 마련하려는 사장(社長)과 낙산사(洛山寺)를 중수하기 위해 시주를 청하는 화주승들이 관아와 민간에 횡행하였다. 이들은 관아를 찾아가 모연문을 보여 주며 시주를 요청하였고, 관아에서는 다시 민간에서 재물을 거두어들였다(『세조실록』 14년 5월 6일). 하지만 낙산사 등의 중수는 모두 국비로 충당하고 화주승을 따로 두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모두 가짜였다.

화주승이 본연의 역할인 사찰 재원 마련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 활용된 사례도 있다. 1472년(성종 3)에는 공조(工曹)의 청에 따라, 각 관찰사로 하여금 화주승을 선발해 재물을 모아 역원(驛院) 건물을 보수하게 하였다(『성종실록』 3년 2월 28일). 또 1599년(선조 32)에는 비변사에서 화주승을 임명하여 재물을 모으면 국비를 쓰지 않고 군인의 사당(祠堂)을 세울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그대로 실행된 일도 있었다. 화주승의 역할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다양했는데, 때로는 이를 빙자한 사기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숙종실록』 23년 5월 25일). 이는 화주승이 조선 사회에서 신임을 받는 존재였고, 나아가 불교가 여전히 주류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 이봉춘, 「조선 세종조의 배불정책과 그 변화」, 『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 한국불교문화사상사』권上, 1992.
  • 이정주, 「세조대 후반기의 불교적 祥瑞와 恩典」, 『민족문화연구』44,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6.
  • 진나라, 「조선전기 社長의 성격과 기능-불교신앙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22, 한국사상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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