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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양상이 고착화되어 조선후기 숙종대에 “개주에 우리나라 사람이 사로잡혀간 자가 수백 호가 있어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음식이며 상례며 세간의 풍속이 아직도 우리의 제도가 존속되어 있다”고 한 언급이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212023_003 『숙종실록』 2년 12월 23일]). | 이런 양상이 고착화되어 조선후기 숙종대에 “개주에 우리나라 사람이 사로잡혀간 자가 수백 호가 있어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음식이며 상례며 세간의 풍속이 아직도 우리의 제도가 존속되어 있다”고 한 언급이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212023_003 『숙종실록』 2년 12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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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건 및 일화'''== | =='''관련사건 및 일화'''== |
2017년 12월 9일 (토) 23:0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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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개주진 |
한글표제 | 개주진 |
한자표제 | 開州鎭 |
상위어 | 관방(關防) |
관련어 | 산해관(山海關), 역참(驛站), 동팔참(東八站), 진보(鎭堡), 건주야인(建州野人)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전기 |
왕대 | 조선전기 |
집필자 | 김순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개주진(開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4년 4월 14일, 『성종실록』 17년 10월 8일, 『숙종실록』 2년 12월 23일, 『태종실록』 2년 4월 3일, 『성종실록』 11년 10월 15일 |
조선 성종대 중반 명나라가 평안도 의주 1백여 리 밖에 있는 개주에 설치한 진.
개설
개주진은 조선의 압록강과 명의 산해관 사이의 교통로에 설치한 여덟 곳의 역참인 동팔참(東八站) 가운데 한 곳이다. 15세기 중엽인 조선 세조대 중반 이후 건주야인의 세력이 강성해져 요동으로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명나라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개주에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진을 설치했다.
위치 및 용도
개주(開州)는 조선의 의주에서 1백여 리 떨어져 있다. 개주에서 압록강까지는 하루 일정 거리이다. 개주는 산해관 동쪽에 위치한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다. 봉황산은 주변을 관망할 수 있게 우뚝 솟아 있는 데다가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다. 3면이 매우 험하고 한 면만이 겨우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있는 정도라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도 당해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개주의 북쪽은 산길이며 심양(瀋陽)·철령(鐵嶺)·개원(開元)을 향해 있으면서 야인들과 연결된다. 개주의 남쪽은 바닷길로 해개(海蓋)·금복(金復)을 향해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접해 있다. 개주의 서쪽은 요동(遼東)·광녕(廣寧)·금주(錦州)·서주(瑞州)를 향해 연주(燕州)·계주(薊州)와 통한다.
15세기 중엽인 조선 세조대 중반부터 건주야인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건주야인은 명나라 때 남만주의 건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을 일컫는다. 농경화가 진전되고 모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발전이 이루어지자 야인세력, 특히 건주 삼위 지역의 야인들이 요동과 조선의 북방을 침입해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했다. 이런 상황이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자 명은 1467년(세조 13) 건주위를 협공하자며 조선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건주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가 조선군에 의해 참살당했다. 이후 건주야인의 침략은 더욱 빈번해졌고 또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이에 명에서는 요동의 장새(障塞)를 확장해 성을 쌓고자 했다. 1488년(성종 19) 당시 명은 요양(遼陽)으로부터 장성을 쌓고, 애양보(靉陽堡)를 설치하였으며, 또 개주에 성을 쌓고 진을 설치했다. 당초 교통로에 위치한 역참이던 개주는 야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요충지인 진이 되었다. 개주진이 설치되면서 이후 국경을 넘는 조선 사신들은 개주의 대인(大人)에게 으레 선물로 베[布子] 두 필을 보냈다(『성종실록』 24년 4월 14일).
변천 및 현황
요동으로부터 남쪽 해주·개주의 동쪽으로 봉황산 기슭까지 그 땅이 넓고 멀어서 수백 리 이상이었다. 조선 성종대 중반 개주진이 설치된 후 요동에서 개주 사이에는 인가가 즐비하고 곡식이 들을 덮어 사람들의 주거가 번성해졌다. 요동 장새는 개주에서 더 확장되어 파사보(婆娑堡)와 탕참(湯站)에까지 이르렀다. 탕참은 조선의 의주와 거리가 멀지 않았다. 따라서 요동 장새가 조선 국경까지 근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백성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망하는 수가 증가했다. 처음 동팔참 의 개주는 용봉(龍鳳)과 더불어 인가가 없고 초목이 무성해 사나운 범이 출몰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조선 세조대 이후 평안도의 백성 가운데 부역에서 도망한 자가 동쪽으로는 개주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는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평안도는 개주와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압록강 연변 여러 고을의 조선 백성은 강이 얼어 곳곳에 통로가 생기면 개주를 왕래했다. 얼음이 얼면 평평하기가 숫돌 같으면서도 곧기가 화살과 같아 건너기 쉬웠다. 조선 백성들은 그곳의 땅이 기름지고 세를 거두는 것이 매우 적다는 소문에 부역의 괴로움을 피하고 그 헐함을 좇기 위해서 도망갔다. 이러한 상황은 점차 심각해져 조선 성종대에 이르면 개주 사람들은 모두 조선 사람들이라 할 정도였다. 당시 개주 사람들은 중국말을 모르고 오로지 조선말을 사용하며 조선 사람들을 보면 앞을 다투어 고향을 물으며 개주로 오라고 인도하기도 했다(『성종실록』 17년 10월 8일).
이런 양상이 고착화되어 조선후기 숙종대에 “개주에 우리나라 사람이 사로잡혀간 자가 수백 호가 있어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음식이며 상례며 세간의 풍속이 아직도 우리의 제도가 존속되어 있다”고 한 언급이 있었다(『숙종실록』 2년 12월 23일).
관련사건 및 일화
개주는 당 태종이 이곳에 주둔하며 고려를 정벌한 곳이다. 또한 고려 예종조에 금나라 군사가 침공하여 요나라의 개주를 취했다. 이후 요의 유민은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을 도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 공민왕대에는 김의(金義)가 명사 채빈(蔡斌)을 살해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들어 1402년(태종 2) 4월에는 노숭(盧嵩)이 사은 방물(謝恩方物)과 마필을 가지고 가다가 개주참에 이르러 도적을 만나 선물하려던 방물을 모두 다 빼앗기고 겨우 살아 돌아온 적이 있었다(『태종실록』 2년 4월 3일). 1480년(성종 11) 8월 평안도관찰사김교(金嶠)는 흠차내관정동(鄭同) 등이 돌아갈 때에 인마(人馬)와 접대할 물건을 거느리고 요동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동팔참의 개주 지방에 여장을 풀었다가 건주위의 야인 약 2천여 기병의 공격을 받아 사람 30여 명과 말 230여 필, 짐 실은 물건까지 모두 빼앗긴 적이 있다고 보고하였다(『성종실록』 11년 10월 15일).
참고문헌
- 김순남, 「15세기중반~16세기 조선 북방 군역의 폐단과 군액 감소」, 『조선시대사학보』61, 2012.
- 김순남, 「조선 성종대의 建州三衛」, 『대동문화연구』68,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