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잠(金簪)"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
  
 
+
{{의복|대표표제=금잠|한글표제=금잠|한자표제=金簪|대역어=|상위어=잠(簪)|하위어=|동의어=금잠도(金簪導)|관련어=계(笄), 적관(翟冠), 황엄(黃儼)|분야=생활·풍속/의생활/관모|유형=의복|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태종~순종|집필자=이민주|용도=|시기=|관련의례행사=|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107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10027_001 『태종실록』 3년 10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9004_005 『성종실록』 8년 9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10027_001 『태종실록』 3년 10월 27일]}}
{{의복|대표표제=금잠|한글표제=금잠|한자표제=金簪|대역어=|상위어=잠(簪)|하위어=|동의어=금잠도(金簪導)|관련어=계(笄), 적관(翟冠), 황엄(黃儼)|분야=생활·풍속/의생활/관모|유형=의복|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태종~순종|집필자=이민주|용도=|시기=|관련의례행사=|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107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10027_001 『태종실록』 3년 10월 27일],[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9004_005 『성종실록』 8년 9월 4일],[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10027_001 『태종실록』 3년 10월 27일]}}
 
  
 
관모(冠帽)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옆으로 꽂던 금비녀.
 
관모(冠帽)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옆으로 꽂던 금비녀.

2017년 12월 9일 (토) 20:44 기준 최신판



관모(冠帽)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옆으로 꽂던 금비녀.

내용

1403년(태종 3)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이 가지고 온 왕의 관복(冠服)에 금잠(金簪)이 들어 있었다(『태종실록』 3년 10월 27일). 1450년(문종 즉위) 왕비의 관복에 금잠이 들어 있어 면류관을 고정시키는 데 금잠을 사용하였으며, 적관(翟冠)을 고정시키는 데에도 금잠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문종실록』 즉위 8월 3일 2번째기사]. 1477년(성종 8)에는 『제사직장(諸司職掌)』 세자 관복조(世子冠服條에도 금잠을 꽂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금잠은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세자가 꽂은 비녀임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8년 9월 4일).

용례

國王冠服一副 (중략) 金簪一枝金葵花大小六箇(『태종실록』 3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