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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8 판




총론

[1596년(선조29)∼1663년(현종4) = 68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덕기(德基), 호는 화곡(華谷) · 견지(見志)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우의정서경우(徐景雨)이고,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성염(成恬)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조카이고,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의 양부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5) 생원시에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연달아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거듭 실패하여 과거를 포기하였는데도, 그 명성은 여전하였다. 음보(蔭補)로 1631년(인조9)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임명되었고, 3년 만에 부솔(副率)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뒤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로 선임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끝마치고, 다시 사부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14) 봉림대군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淸)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자, 상신(相臣)을 따라 만주로 가다가 미처 국경을 넘기 전에 흉년으로 인하여 수행원을 감축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1639년(인조17) 다시 사부 자리에 임명되어 청나라로 가서 심양관(瀋陽館)에서 봉림대군을 모시다가, 1년 남짓 지난 다음 돌아와서 관례대로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3년 뒤에 호조 정랑으로 옮겼으나, 면포(綿布)를 수납할 때 정해진 법식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세자익위사 익위(翊衛)에 임명되었다. 1645년(인조23)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끝마치고 공조 정랑을 거쳐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가 연달아 배천군수(白川郡守)에 임명되었다.

효종 시대 북벌 계획의 추진

1651년(효종2) 천안군수(天安郡守)에 임명되어, 새로 재정한 대동법(大同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치적이 으뜸이었는데, 1년 남짓 지나서 그가 사임하자,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를 칭송하였다. 그는 벼슬살이에 마음이 없어 금천(衿川)의 별장에서 수석(水石)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면서 스스로 호를 화곡(華谷)이라고 하였다. 그때 세자(世子: 현종)를 위하여 동궁의 강관(講官)을 두었는데, 1652년(효종3) 효종이 서원리를 발탁하여 진선(進善)의 직임에 임명하였다. 1653년(효종4)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으나, 진선을 겸임하였다. 이어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되었는데, 효종이 곧바로 그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공조 · 호조의 참의를 거쳐,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와서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다. 1656년(효종7) 경상도관찰사로 나가서, 효종의 북벌 계획(北伐計劃)의 일환으로 군정(軍政)을 쇄신하였기 때문에 효종이 포장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조정에 돌아와서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우승지 · 좌승지를 맡아서 효종의 북벌 계획을 직접 도왔다. 1658년(효종9) 강화유수(江華留守)로 나갔는데, 강화도가 북방 오랑캐와 싸울 때마다 나라의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기 때문에, 그 방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병기(兵器)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저축하였으며 직장목(直長木)을 포구에 세워서 유사시에 목책(木栅)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처음에 강화유수를 인수인계하는 자리에서 말씨가 거칠었다고 사헌부에서 탄핵하자, 그는 상소를 올리고 사임하였으나, 효종은 그대로 유임시켰다. 효종 시대에 그는 효종의 북벌 계획을 실제로 맡아서 추진하였던 인물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에서 다시 그를 탄핵하였으므로, 강화 유수를 사임하였다. 1660년(현종1)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총관(摠管)을 겸임하였고, 곧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전임되었다. 1661년(현종2) 자원하여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가려던 참에, 원두표(元斗杓)의 천거로 호조 참판에 임명되고,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662년(현종3) 궁가(宮家: 왕가)에서 궁방전(宮房田)을 마련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겸병(兼幷)한 사실을 핵실(覈實)하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는 재차 계사(啓辭)를 올려서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그해 겨울에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북방에 가서 풍토병에 걸려, 1663년(현종4) 4월 23일에 함흥부(咸興府)의 관사에서 객사하니, 향년이 68세였다.

성품과 일화

서원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성실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타고난 기품은 침착하고 의연하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을 맡아 처리함에 있어서 성심을 다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일체 세상사의 재미나 사치를 남의 일처럼 여기고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도리를 어겨가면서까지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일을 재촉하여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일도 없었다.

『현종실록(顯宗實錄)』에 졸기가 남아있는데, 여기서 사관(史官)은 “서원리는 과거 급제를 통해 발신(拔身)하지 않고, 특별히 사부(師傅)의 구은(舊恩)이 있다고 하여, 효종의 지우(知遇)를 받아, 안으로는 대각(臺閣)의 자리를 역임하고, 밖으로는 방백(方伯: 관찰사)의 직임을 제수 받았으니, 근세에 드문 일이다.”라고 평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영평(永平) 서쪽 금화봉(金華峰)의 선영(先塋)에 있으며, 둘째 부인과 합장하였다. 양자 영의정서문중이 지은 묘지(墓誌)가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삭녕최씨(朔寧崔氏)는 영안군(寧安君)최산립(崔山立)의 딸이고, 둘째 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영의정김육(金堉)의 딸인데, 모두 자녀가 없어서, 4촌 동생 서정리(徐貞履)의 아들 서문중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