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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황해도 황주자비산에 소재한 심원사는 고려초에 도선(道詵) 국사(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사명(寺名)은 기록에 따라 ‘심원사(深源寺)’ 또는 ‘심원사(心源寺)’ 혹은 ‘심원사(深元寺)’라고도 하였다. | |
(2) 조선시대 | (2) 조선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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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자비산의 심원사와 관련한 기록은 광해군대에 다시 등장한다. 유팽석(柳彭錫)이란 자가 봉산군수(鳳山郡守)신율(申慄)에게 심원사에서 글을 읽다가 옆방에서 들려온 역모와 관련된 이야기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내용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3018_006 『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3월 18일]). 그리고 유팽석의 아내와 딸도 그 일에 대해 진술하면서([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4001_007 『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4월 1일]) 심원사를 언급하였다. 이어 숙종대에도 심원사와 관련한 기록이 다시 등장한다. 비변사에서 황해도의 군사 현황을 보고한 [[사목(事目)]] 가운데, 심원사가 있는 황주의 역계령(易界嶺)과 무초령(蕪草嶺)의 좁은 길 아래에 초소라고 할 수 있는 둔(屯)이 있는데 군인과 승려가 두 영(嶺)을 나누어서 지키므로 심원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601006_001 『숙종실록』 6년 1월 6일]). 그러므로 심원사가 있던 지역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 |
− | + | 심원사는 1506년(연산군 12)부터 1580년(선조 13)까지 네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1573년(선조 6)에는 계묵(戒墨)이 건물을 중수하고 이듬해에 53불(佛)을 봉안하였다. 그 후 1709년에 승려 수옥(修玉)이 앞장서서 시주금을 모아 사찰을 중건하였는데, 이여택이 이 내역을 사적비에 썼다. | |
− | + | 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심원사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앞에 청풍루가 있고, 동쪽에 응진전, 서쪽에 향로각과 칠성각이 있다. 보광전과 청풍루는 고려말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 *「심원사사적비(心源寺事蹟碑)」 |
− | * | + | *김용국, 『황해도지』, 황해도, 1970. |
− | * | + | *韓國佛敎宗團協議會 編纂, 『北韓寺刹硏究』, 寺刹文化硏究院 出版部, 1993. |
− | + |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 자비산(慈悲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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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8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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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심원사 |
한글표제 | 심원사 |
한자표제 | 深源寺 |
동의어 | 심원사(心源寺), 심원사(深元寺) |
관련어 | 심원사사적비(心源寺事蹟碑), 이색(李穡), 이여택(李汝澤)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 자비산(慈悲山)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원사(深源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1년 5월 5일, 『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3월 18일, 『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4월 1일, 『숙종실록』 6년 1월 6일 |
조선시대 황주 지역 산성의 둔(屯)을 지키던 절.
개설
심원사(深源寺)는 고려초에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고려말에 절이 많이 퇴락하였으나 이색이 중건하였으며 부근의 지세가 군사적 요충지라고 판단하여 성을 쌓았다. 조선시대에는 심원사 승려들이 산성의 둔(屯)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조대에 53불을 봉안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숙종대 황주목사이여택은 이색의 12대손으로서 승려 수옥이 심원사를 중수할 때 적극 도왔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황해도 황주자비산에 소재한 심원사는 고려초에 도선(道詵) 국사(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사명(寺名)은 기록에 따라 ‘심원사(深源寺)’ 또는 ‘심원사(心源寺)’ 혹은 ‘심원사(深元寺)’라고도 하였다.
(2) 조선시대
1709년(숙종 35)에 황주목사이여택(李汝澤)이 쓴 「심원사사적비(心源寺事蹟碑)」에 의하면, 고려말에 절이 많이 퇴락하였으나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이색(李穡)이 퇴락한 절을 보고 중수하였으며, 또 부근의 지세가 군사적으로 요새가 될 만 곳이라고 판단하여 성을 쌓았지만 큰 가뭄이 계속되어 완공하지 못한 채 중단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적비의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451년(문종 1)에 황해도도체찰사(黃海道都體察使)정분(鄭苯)이 새로 설치할 성을 측량하여 보고한 내용 가운데, 심원사 남쪽 언덕에 있는 2,500척의 옛 석성(石城)은 봉산(鳳山)으로 통하는 좁은 길인데 새로 쌓아야 할 성이 1,602척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문종실록』 1년 5월 5일).
자비산의 심원사와 관련한 기록은 광해군대에 다시 등장한다. 유팽석(柳彭錫)이란 자가 봉산군수(鳳山郡守)신율(申慄)에게 심원사에서 글을 읽다가 옆방에서 들려온 역모와 관련된 이야기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내용이다(『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3월 18일). 그리고 유팽석의 아내와 딸도 그 일에 대해 진술하면서(『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4월 1일) 심원사를 언급하였다. 이어 숙종대에도 심원사와 관련한 기록이 다시 등장한다. 비변사에서 황해도의 군사 현황을 보고한 사목(事目) 가운데, 심원사가 있는 황주의 역계령(易界嶺)과 무초령(蕪草嶺)의 좁은 길 아래에 초소라고 할 수 있는 둔(屯)이 있는데 군인과 승려가 두 영(嶺)을 나누어서 지키므로 심원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이 있다(『숙종실록』 6년 1월 6일). 그러므로 심원사가 있던 지역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심원사는 1506년(연산군 12)부터 1580년(선조 13)까지 네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1573년(선조 6)에는 계묵(戒墨)이 건물을 중수하고 이듬해에 53불(佛)을 봉안하였다. 그 후 1709년에 승려 수옥(修玉)이 앞장서서 시주금을 모아 사찰을 중건하였는데, 이여택이 이 내역을 사적비에 썼다.
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심원사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앞에 청풍루가 있고, 동쪽에 응진전, 서쪽에 향로각과 칠성각이 있다. 보광전과 청풍루는 고려말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심원사사적비(心源寺事蹟碑)」
- 김용국, 『황해도지』, 황해도, 1970.
- 韓國佛敎宗團協議會 編纂, 『北韓寺刹硏究』, 寺刹文化硏究院 出版部,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