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순보(漢城旬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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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 서울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개설

19세기 후반 서양문물의 전래와 이양선(異樣船)의 잦은 출몰 상황 속에서 근대 신문 『한성순보』가 발행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신문의 창간은 개화파 주도로 진행되었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 외국의 사정·지리·과학 등에 대한 소개는 지식층의 지식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반면 제국열강의 침략성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던 한계도 있다.

연원 및 변천

개항 직후 개화파는 국민계몽과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일본의 협조하에 근대 신문의 발행을 도모하였다. 1882년(고종 19) 박영효는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신문 발행을 도와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論吉]의 제자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박영효는 1883년 1월 고종의 윤허를 얻어 자신이 판윤으로 있는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창간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박영효가 보수세력의 반발에 의해 그해 4월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면서, 창간 작업은 일단 중지되었다. 이때 당시 창간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유길준도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러는 동안 신문창간 작업은 급진개화파에서 김윤식·김만식 등의 온건개화파 세력으로 바뀌어 진행되었다.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장교(掌敎)였던 김만식이 통리아문장정에 있는 “동문학(同文學)에 서적을 간행하고 신문보사를 개설한다.”는 규정을 들어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8월 고종은 동문학에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재가하였다. 이후 박문국이 저동(苧洞)에 설치되었다.

박문국의 초대 총재는 외아문독판(外衙門督辦)민영목, 부총재는 협판(協辦)김만식, 편집주임격인 주사는 부사과(副司果)김인식, 실무진으로 사사(司事)장도·오용묵·김기준·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약 2개월의 신문발행 준비 끝에 1883년 10월 30일 마침내 『한성순보』가 창간하였다.

기사의 내용은 관보적 기사와 개화사상을 담고 있는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성순보』의 독자층은 주로 중앙 및 지방의 관리들과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양반계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 발생한 화재로 박문국 건물이 소실됨으로써 『한성순보』는 창간 14개월 만에 폐간되었다. 정변 후 통리아문 독판으로 임명된 김윤식은 신문 속간을 추진하였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일본에 보내어 활자와 기계를 구입했고, 한글 활자도 들여왔다. 드디어 박문국이 중부 경행방(慶幸坊, 현 서울 종로구 낙원동 부근) 교동에 중건되었다. 편집진용도 주사 13명 등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그 결과 1886년 1월 『한성주보(漢城周報)』로 제호를 바꿨고 국한문혼용으로 1주일마다 발행되었다. 박문국의 운영은 세금과 구독료에 의존했는데, 『한성주보』는 세금의 체납과 구독료의 미납 등으로 경영난을 겪다가 1888년(고종 25) 7월 폐간되었다.

형태

『한성순보』는 10일에 1번씩 발행되는 순간(旬刊)으로 매월 1일자로 발행되었다. 체제는 약 17×24㎝ 정도 오늘날의 국배판과 비슷한 크기의 전단제(全段制)로 매호 24면(1면 23행, 1행 47자)을 제작하였다. 표제와 본문 모두 25호 활자를 사용하였고, 사용 문자는 순한문이었다. 기사의 종류는 국내 관보와 국내 사보(私報)-사회면 기사, 각국근사(各國近事)-외신기사, 잡록(雜錄)-논문 또는 피처 기사, 본국고백(本社告白)-사고(社告), 시직탐보(市直探報)-물가정보 등으로 분류하여 게재했다.

참고문헌

  • 최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90.
  • 김영주, 「한성순보: 연구개관, 쟁점 및 성격」, 『신동아』6, 1997.
  • 이광린,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38, 1968.
  • 이수용, 「한성순보에 나타난 개화·부강론과 그 성격」,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8.
  • 정진석, 「한성순보·주보에 관한 연구」, 『신문연구』통권36호,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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