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국(博文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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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한 동문학 부속 기구

개설

1883년(고종 20) 8월 17일 외국어 교육을 담당하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동문학(同文學) 부속기구로 설치되었다. 민영목(閔泳穆)과 김만식(金晩植)이 당상관, 김인식(金寅植)이 주사,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고문으로 삼아서 박영효와 유길준이 한성부(漢城府) 심문국에서 추진하고 있던 근대 신문의 창간작업을 준비하였다. 이해 10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종은 개항 이후 조선을 서구적 근대 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해 개화파를 양성하는 방안으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한다. 당시 유학생을 받아들였던 일본의 학교 중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경영하던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소속되었던 유길준 등은 조선에 신문을 창간하고자 했다. 특히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박영효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의 적극적인 발의와 고종의 윤허로 바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에 후쿠자와는 제자 이노우에를 한성에 파견하여 그 실무를 담당하게 했고 그것을 실천하는 기구로 박문국을 이용하였다. 당시 박영효가 한성부윤이었으며, 유길준은 통리아문의 주사였으므로 신문 발간을 물심양면에서 후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되고, 유길준도 사직하여 신문 발간 계획은 지연되었다. 그럼에도 신문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어 이노우에의 저동(苧洞) 집에 박문국을 설치하고 1883년 10월 30일 『한성순보』를 창간한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박문국이 난민들에 의해 불태워져 소실되어 신문발간은 중지된다. 이후 1885년 5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건의하여 다시 박문국이 설치되었으며,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를 이은 『한성주보(漢城週報)』를 발간하고 외국 서적도 출판했다. 박문국은 신문만이 아니라 매월 3회에 걸쳐 관보와 행정사항, 각국 신문지, 고금도서를 중심으로 천하의 형세 등의 논설을 게재했다.

조직 및 역할

박문국은 저동에 위치했으며, 부사과(副司果)김인식(金寅植)을 주사(主事), 유학(幼學)장박(張博)·오용묵(吳容默)·김기준(金基俊)을 사사(司事)로 삼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편수(編修)를 담당하였다. 10월에 『한성순보』를 발간하였으며, 1884년 10월 갑신정변 때 폐간되었다가 1885년 다시 복간되었다.(『고종실록』 22년 3월 28일) 신문은 그 명칭과 같이 순간(旬刊)인 10일마다 발행되었고 기사의 내용은 궁궐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인 궁정녹사(宮廷錄事), 내외 관리의 이동, 외교 조약, 저자 및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시구탐보(市區探報), 각 단체기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독자는 대부분 관리였고 내용도 대개가 관변의 일이였기 때문에 관보의 성격을 보였다. 1886년(고종 23) 1월에 일주일 단위로 발간하는 주보(週報)로 바꾸었으며 문체도 김윤식과 이노우에의 발의로 한글과 한문을 혼용해 사용했다. 내용도 범위를 넓히고 일반인에게도 전달되어 대중적인 신문으로 진입하였다.

『한성순보』가 폐간된 것은 갑신정변 세력을 진압했던 청나라 군인이 서울에서 대광통교(大廣通橋)의 최택영(崔宅英) 약방에 난입해 인명을 살해한 것을 10호와 11호에 게재한 이후 북양대신직예총독(北洋大臣直隷總督)이홍장(李鴻章)이 이를 보고 총판조선상무(總辨朝鮮商務)진수당(陳樹棠)에게 엄하게 명령을 내려 조사한 뒤 보고하게 한 것이 배경이었다. 진수당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박문국에 조회하여 『한성순보』에 기재한 것이 풍문을 등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辨交涉通商事務)김병시(金炳始)는 박문국원이 소문만을 믿고 신문에 게재했다고 하였다. 이후 이노우에는 그 책임을 지고 귀국하였으며 신문 발행은 정지되었다.

변천

1885년(고종 22) 3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계청(啓請)에 따라 박문국을 광인사(廣印社)로 이설케 하였다. 이후 박문국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다 1888년(고종 25) 7월 내무부의 요청에 따라 폐지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부속되었다. 당시 내무부에서는 박문국이 빚을 갚기 위해 외읍(外邑)에서 세금을 요구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폐지 이유로 삼았다. 박문국이 정부의 정식 예산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일반 관청처럼 세금징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위임받아 그것을 이용하여 예산을 마련했던 것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25년 6월 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 『한성순보(漢城旬報)』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매천야록(梅泉野錄)』
  • 『개벽(開闢)』
  • 김병기, 「개화기 논설에 비친 대외문제와 일본인식-한성순보·주보를 중심으로-」, 『개화기 한국과 세계의 상호이해』, 국학자료원, 2003.
  • 이광린,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에 관한 일고찰」, 『역사학보』38,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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