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련대(下輦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성균관에 거둥한 국왕이 타고 온 연(輦)을 임시로 보관하기 위해서 조성된 장소.

개설

하련대(下輦臺)는 성균관에 위치하며, 국왕의 가마를 임시로 보관하거나 국왕이 과거를 시행하면서 임시로 거처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민종현(閔鍾顯)이 찬술한 『태학지(太學志)』에 수록된 반궁도(泮宮圖)에 따르면, 하련대는 성균관 좌우를 흐르는 반수(泮水) 위에 설치된 중석교(中石橋)를 건너 탕평비각(蕩平碑閣)과 식당(食堂)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국왕의 거둥 시에 국왕이 연에서 내리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 단을 설치하였으며, 국왕이 타고 온 연을 이곳에 보관하였다.

성균관에 거둥한 국왕은 하련대 일대에서 무사들을 대상으로 무과(武科)를 시험보거나(『중종실록』 3년 2월 9일)(『명종실록』 2년 윤9월 25일), 유생에게 활을 쏘도록 하였으며(『중종실록』 23년 4월 27일), 무사의 시취(試取)(『선조실록』 21년 5월 29일) 등을 시행하였고, 과거 후에는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의 장소(『성종실록』 19년 4월 26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743년(영조 19)에는 하련대에서 대사례(大射禮)를 시행하고, 장소를 옮겨 명륜당에서 시사(試士)하였다(『영조실록』 19년 3월 29일).

한편, 연산군대에는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기악(妓樂)을 울리기도 하였고(『연산군일기』 10년 8월 17일), 숙종은 이곳에서 비망기(備忘記) 형태로 유생들게 전교를 내리기도 하였다(『숙종실록』 17년 8월 10일).

변천 및 현황

조선시대 성균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하련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80년(성종 11) 2월 기록에 처음으로 하련대가 등장한다(『성종실록』 11년 2월 7일). 이전에도 국왕이 여러 차례 성균관에 거둥하였으나 당시에는 하련대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로 볼 때, 하련대는 성종 연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하련대와 그 일대는 시사 장소나 대사례를 거행하는 장소 등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련대란 명칭의 개정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즉 1606년(선조 39) 당시 중국에서 파견된 부사(副使)가 문묘중수기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하련대가 이름이 없다고 하며 엄약대(儼若臺)라는 이름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물론 엄약대의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조선 측에서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9년 5월 15일). 조선에서는 엄약대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뜻이 자세하지 않으며, 만약에 『예기』 「곡례(曲禮)」 편에 나오는 “장중하고 엄숙하게 생각하다[儼若思].”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면 별로 좋은 명칭이 아니라고 하여 채택하지 않았다(『선조실록』 39년 5월 15일).

형태

방자형(方子形)의 기단을 조성한 뒤 사방에 축석하고 그 위에 잔디를 입혔다.

관련 사건 및 일화

1493년(성종 24) 가을에 국왕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문묘를 배알한 뒤 하련대에 국왕의 임시 거처인 장전(帳殿)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 이때 재상들은 장전 내에 입시하고, 당하관인 문신들은 뜰에 줄을 지어 앉았으며, 팔도의 유생이 운집하니, 무려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상하가 모두 꽃을 꽂고 연회석에 참석하였고, 새로 지은 악장(樂章)으로 연주하였으며, 각 관청이 나누어 음식을 장만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용재총화(慵齋叢話)』
  • 『태학지(太學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