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교단(北郊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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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가물 때, 지기(地祇)인 악(嶽)·해(海)·독(瀆) 및 여러 산천에 비가 내리기를 빌기 위해 도성 북쪽 교외에 설치한 제단.

개설

국가의 제사 대상이 되는 자연물 가운데 땅에 속한 것을 지기라고 한다. 한편 명산대천이 있는 지방까지 갈 수 없는 경우, 가까운 곳에 설치한 제단에 해당 산천의 신위를 모시고 산천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지내는 제사를 망제(望祭)라고 한다. 북교단(北郊壇)은 날이 가물 때 지기에게 비가 내리기를 비는 망제 형식의 기우제를 거행한 제단으로, 북단(北壇)이라 부르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년 5월 14일).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에서 북교단 또는 북단은 대개 가뭄이 들었을 때 악·해·독 및 여러 산천에 비를 빌던 제단을 가리키지만, 간혹 여제단(厲祭壇)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날이 가물 경우, 도성의 북쪽인 창의문(彰義門) 밖[『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조지서현(造紙署峴) 건너편 평창에 설치한 제단에 악·해·독 및 모든 산천의 신위를 설치하고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시한북교망기악해독급제산천의(時旱北郊望祈嶽海瀆及諸山川儀)’를 망제(望祭) 형식으로 거행하는 제단이다. 단이 도성 북쪽 교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북교단 또는 북단으로 불렸다. 조선후기에는 기우제에 왕이 직접 참석하는 친제(親祭)가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북교단에서 거행된 기우제에 영조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흑원령포(黑圓領袍)에 옥대(玉帶)를 두르고 흑화(黑靴)를 신고 참석하여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영조실록』 1년 7월 24일).

변천 및 현황

1413년(태종 13)에는 예조(禮曹)에서, 북교에 단유(壇壝)가 축조되어 있지만, 법식과 다르다며 개축할 것을 건의하였다(『태종실록』 13년 6월 8일). 1679년(숙종 5)에는 예조의 주청에 따라 남단(南壇)의 제도를 본떠 무너진 단유를 수축하고 신문(神門)은 홍살문으로 하였다. 이러한 단의 제도는 대한제국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형태

북교단은 신위를 모시고 예찬(禮饌)을 진설하는 제단과 단을 둘러싼 2개의 담, 제사가 끝난 뒤 폐백과 축판을 묻는 구덩이인 예감(瘞坎)으로 이루어졌다. 단의 규모는 너비가 2장(丈) 3척(尺), 높이가 2척 7촌(寸)이며, 단의 사면에는 오르내릴 수 있는 섬돌을 설치하였다. 단을 둘러싼 담은 2개인데, 길이가 각각 25보(步)이다. 예감은 단의 북쪽인 임지(壬地)에 땅을 파서 만들었다.

제단 위에는 악·해·독 14위와 오방(五方) 산천을 합쳐 총 19위를 방위에 맞춰 안치하였다. 이러한 배치는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산천의 보편적인 능력과 산천 신(神)이 오방에 배열됨으로써 생기게 되는 오행의 힘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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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대한예전(大韓禮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춘관통고(春官通考)』
  • 『태상지(太常誌)』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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