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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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에 적체되었던 노비 쟁송을 판결하기 위해 설립한 임시 기구.

개설

고려 말 적체된 노비 쟁송은 커다란 사회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전민변정도감이나 인물추변도감 등과 같은 특별 기구를 설립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도 노비 쟁송을 새로운 정치를 하는 데 있어 개혁해야만 하는 과제로 인식하였다. 태종 때의 기록을 보면 당시 노비 쟁송을 위해 올린 소장이 12,797장이나 되었다(『태종실록』 14년 6월 16일). 이렇게 적체된 노비 쟁송은 사회 불안을 야기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태조는 노비변정도감을 설립하였다. 이후 노비변정도감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414년(태종 14)을 끝으로 설치되지 않았다. 이후 노비 관련 쟁송은 1467년(세조 13) 정월에 노비 쟁송을 전담하는 장예원이 설립되면서 여기에서 전담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노비 쟁송은 고려 말 사회의 최대 현안이었다. 고려 정부는 전민변정도감이나 인물추변도감 등과 같은 임시 특별 기구를 설립하여 노비 쟁송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특별 기구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면서 노비 쟁송 해결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게도 노비 쟁송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였다. 태조는 노비 쟁송을 없애고자 법을 고치는 한편 번잡한 쟁송을 해결하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1395년(태조 4) 11월 형조도관(刑曹都官)박신(朴信) 등이 노비로 인한 송사를 해결하기 위하여 법을 고치고, 별도의 기구 설립을 건의하였다. 이에 태조는 같은 해 12월 25일 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적임자를 선발하여 노비 쟁송을 판결하도록 하였다. 이후 1397년 7월 변정도감은 노비 쟁송을 판결할 법적 기준으로 「합행사의(合行事宜)」 19개 조를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비 쟁송을 영원히 근절하고자 하였다.

즉, 노비변정도감은 조선 초기 적체되었던 노비 쟁송을 처결하여 노비 관련 송사를 없애고자 설립한 임시 기구이다.

조직 및 역할

1395년 노비변정도감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의 관원은 남재(南在)·한상경(韓尙敬)·김희선(金希善) 등 판사(判事) 3명이었다. 이후 1414년(태종 14) 4월에 설립된 노비변정도감에는 정2품 판서를 제조(提調)로 삼았고, 시산관(時散官) 3품으로 사(使)를 삼고, 4품으로 부사(副使)를 삼고, 5·6품으로 판관(判官)를 삼았다. 변정도감의 업무는 15방(房)으로 나누어 방마다 사·부사·판관을 각각 1명씩 두어서 모두 45명을 두었고, 따로 도청(都廳) 12명을 두었다(『태종실록』 14년 4월 14일). 1414년(태종 14) 8월에는 변정도감에 판관 20명을 더 두어 20방에 나누어 예속시켰으며, 1414년 10월에는 변정도감의 관원이 20방에 80명이나 되었다(『태종실록』 14년 10월 10일). 노비변정도감은 노비 신분의 변별, 노비 소유 관계의 규명, 노비의 속공(屬公) 및 노비 문서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변천

1395년 태조는 노비변정도감의 설립을 통해 적체된 노비 쟁송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1399년(정종 1) 3월에 정종은 노비변정도감을 혁파하고, 아직 판결하지 못한 것과 잘못 판결한 것을 모두 형조도관(刑曹都官)으로 이송하였다. 1400년 6월에는 권근의 건의로 노비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하고, 15방을 만들어 육조(六曹)·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각문(閣門)과 시(寺)·감(監)의 관리를 소속시켜 노비 쟁송을 처결하도록 하였다.

1404년 1월에는 변정도감에서 판결할 것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처결하도록 하면서 변정도감을 혁파하였다. 1405년 5월에 노비변정도감을 다시 세웠다가 곧 폐지하였다. 1414년 6월에는 노비 소송 건수가 많이 적체되자 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하여 소송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때 변정도감에 제출된 소장이 12,797장이나 될 정도였다. 그래서 신설된 변정도감에는 대간(臺諫) 1명이 간여하여 판결하도록 하고, 5방(房)에 각각 3명을 더 두었다. 1414년 10월 15일 다시 변정도감이 혁파되고 이후로는 다시 설립되지 않았다.

1414년 변정도감이 혁파된 이후 노비 쟁송은 형조도관에서 담당하다가, 1467년 정월 이후로는 새로 설립된 장예원에서 노비 쟁송을 전담하였다.

참고문헌

  • 김안숙, 「효종연간 노비추쇄도감설치의 배경과 성격」, 『교남사학』2, 1986.
  • 김용만, 「조선시대 장예원연구 서설」, 『교남사학』3, 1987.
  • 김형수, 「13세기 후반 고려의 노비변정과 그 성격」, 『경북사학』19, 1996.
  • 성봉현, 「조선 태종대 노비결절책과 그 성격: 태종 5년 「노비결절조목」을 중심으로」, 『진단학보』88,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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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운, 「조선 태조조의 노비의 변정에 관하여: 태조 6년 소정의 「노비합행사의(奴婢合行事宜)」를 중심으로」, 『전북사학』2,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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