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건(高弘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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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0년(선조13)~1655년(효종6) = 76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 때 활동한 무신(武臣). 자(字)는 입부(立夫)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인데, 영성군(瀛城君)고희(高曦)의 양아들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613년(광해군5) 수문장(守門將)이 되었다. 양아버지 고희가 호성공신(扈聖功臣)영성군이었으므로, 공신(功臣)의 적장자(嫡長子)라 하여 6품(六品) 관직에 승진하였다. 여러 무관직을 거쳐서 1622년(광해군13) 찬획사(贊畫使)의 군관(軍官)이 되었고, 공을 세워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仁祖)를 공주(公州)로 호종하였기 때문에 영원군(瀛原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1625년(인조3) 희천군수(熙川郡守)로 임명되었다가 1631년(인조9) 여산영장(礪山營將)이 되었는데, 사졸(士卒)들에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그곳의 군사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이후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는데,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대가(大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서문협수장(西門協守將)이 되어 후금(後金) 오랑캐와 싸워서 서문(西門)을 지켜냈다. 1637년(인조15)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가, 서흥부사(瑞興府使)로 나갔다. 1647년(인조25) 영국공신(寧國功臣)의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였다. 1651년(효종2)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서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고향 부안의 대나무 숲속에다 집을 짓고 남은 여생을 즐기다가, 1655년(효종6) 병으로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묘소와 성품

묘소는 전라도 부안 하서(下西)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조복양(趙復陽)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송곡집(송곡집)』 권10 「영원군고공묘비명(瀛原君高公墓碑銘)」).

고홍건(高弘建)은 기골이 장대하고 수염이 보기 좋았으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하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후덕하여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한다고 알려졌다. 젊어서 글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벼슬에 나가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글을 읽은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백주집(白洲集)』
  • 『송곡집(松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