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묘(懷墓)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묘.

개설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하자 성종은 후궁이던 숙의윤씨(淑儀尹氏)를 중궁으로 삼았다. 하지만 3년 만인 1479년(성종 10) 중전 윤씨(尹氏)는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나가고 형제들과도 격리된 삶을 살게 되었다(『성종실록』 10년 6월 2일). 다시 3년 뒤인 1482년(성종 13) 폐비(廢妃) 윤씨는 살던 집에서 그대로 사사(賜死)되었다(『성종실록』 13년 8월 16일).

경기도 장단(長湍)에 묘소가 마련되었고 ‘윤씨지묘(尹氏之墓)’라는 비천한 묘지명 아래 묻혔다. 이러한 윤씨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것은 왕위에 오른 아들 연산군이었다. 성종시기부터 폐비 윤씨의 묘소는 풍수적으로 불길한 기운에 놓여 있다며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옮기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즉위한 후 천륜과 의리를 내세우며 어머니의 죽음을 살펴 ‘회묘’를 조성하고 이후 ‘회릉(懷陵)’으로까지 격상시켰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4일). 그러나 연산군마저 폐위된 후로는 회릉은 ‘윤씨지묘’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위치 및 용도

사사 당시 윤씨는 이미 서인인 까닭에 집안에서 그 시신을 수습하여야 했다. 하지만 세자의 낯을 보아 국가에서 경기도 장단에 터를 정하고 장사를 지내 주었다.

변천 및 현황

1496년(연산군 2), 왕은 내시를 보내어 폐비의 묘를 살피게 했다. 묘소가 무너져 여우와 삵이 시신을 해할 지경이라는 보고를 받고 연산군은 곧바로 묘를 옮기겠다는 어서를 내렸다.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용서 없이 참하겠다는 연산군의 강경한 태도에 신료들도 한발 물러나고 폐비 윤씨의 묘소는 새로이 조성되는 절차를 밟게 되었다. 이장할 자리를 살폈고 능침에 버금가는 넓은 묘역을 정하였다. 지금의 경희의료원이 있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일대였다.

1497년(연산군 3) 1월부터 묘를 옮기는 절차를 행하면서 연산군은 도감을 세우는 것, 빈(嬪)의 예를 갖춰 장례하는 것, 석양·석마 등을 세우는 것, 신주를 만들고 사당을 세우는 것의 불가함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모든 의견을 무시하고 새로운 묘소를 장대히 조성하였다. 어머니를 회상하겠다는 뜻이었는지 ‘회묘(懷墓)’라는 애틋한 뜻이 담긴 묘호로 고쳐 정하는 것과 함께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당도 세웠다. 그러나 연산군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고 1504년(연산군 10) 회묘를 ‘회릉’으로, 효사묘는 ‘혜안전(惠安殿)’으로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하였다. 그러나 중종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 이 모든 상황을 연산군 이전으로 돌렸다. 묘소는 돌난간만 남기고 모든 의위석물(儀衛石物)을 철거하였다.

1969년 10월에는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있는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련 사건 및 일화

폐비 윤씨가 사사될 때 “세자가 왕이 되거든 거둥하는 길에 행차하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게 길가에 묻어 달라.” 하며 유언하였고, 건원릉(健元陵) 가는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는 야사가 전한다.

참고문헌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