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니지쟁(懷尼之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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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회덕에 살았던 송시열과 니산에 살았던 윤증 사이에 일어난 갈등.

개설

회니지쟁은 ‘회니시비(懷尼是非)’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는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정치적, 학문적 시비 논쟁이었다. 17세기 말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갈등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1683년 서인(西人)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당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18세기 탕평 정치기에는 정국 변동의 방향을 보여주는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19세기 철종대까지 그 논쟁이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병자호란에 패배하여 1637년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이후, 선비와 관료들 가운데 자의반 타의반으로 벼슬길을 거부하고 향리에 은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특히 충청도 연산(連山)·회덕(懷德)·공주(公州)·니산(尼山) 등의 지역에 은거하여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문하에서 함께하며 그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일군의 선비들이 호서(湖西) 산림(山林)을 형성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윤선거(尹宣擧) 등이 있었다. 이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반청(反淸) 척화(斥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주자학(朱子學) 명분론(名分論)과 의리론(義理論)의 수호자로 자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집 문하에서 주자학을 연마하는 동시에 당시 반청 척화의 상징이던 김상헌(金尙憲)을 대로(大老)로 숭상하였다. 그리고 학문과 처신의 문제를 비롯한 예제(禮制)는 물론 신변잡기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때로는 직접 만나거나 아니면 편지를 통하여 서로 토론하면서 공동보조를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효종~현종대에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렇지만 반청 척화 의리의 실현 방안으로서,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북벌론(北伐論)과 관련하여 이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유계·윤선거 등은 북벌에 필요한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는 전반적인 제도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었으며, 그 방향은 지배층이었던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제거 내지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은 이에 반대하면서 북벌을 주자학 명분론과 의리론에 입각한 도덕과 의리의 차원으로 제한하고자 하였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윤휴(尹鑴)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났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를 비판한 것을 두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성토하였지만 윤선거는 북벌 대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작은 차이를 문제 삼지 말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면서 윤휴를 옹호하였다. 나아가서 윤선거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한 예송(禮訟)을 비판하고, 남인들을 포용하면서 북벌을 위한 제도 개혁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송시열이 주자학과 의리론을 북벌 추진보다 중시하였다면, 윤선거는 주자학이나 예송보다 북벌을 중시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입장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윤선거가 세상을 뜰 때까지 우정을 지속하였다.

발단

회니지쟁은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尹拯)이 부친의 묘갈명(墓碣銘)을 송시열에게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 윤증이 보내 온 윤선거 관련 자료를 검토한 송시열은 그가 윤휴를 비롯한 남인들을 비호한 것을 보고, 그에 대한 불만을 묘갈명에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윤증은 이것이 후세에 송시열 자신에게도 불리한 일이 될 것이라면서 쟁점에 대한 송시열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송시열은 윤휴에 대한 이들 부자의 모호한 태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그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하였다(『숙종보궐정오실록』 13년 3월 19일).

이와 함께 윤증은 이유태의 예설(禮說)과 관련된 송시열의 모호한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되었으며, 충청도 목천(木川) 지역에서 윤선거를 비방하는 통문(通文)이 나오자 송시열에 대한 의심이 깊어졌다. 이에 송시열 학문의 본원(本源)을 비판하는 편지를 작성하였는데, 박세채(朴世采)의 만류로 보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이 편지가 송시열과 그 문인들에게 전해지자, 그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신(崔愼)이 1684년(숙종 10) 상소하여,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윤증을 비난하면서, 회니지쟁은 조정의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숙종실록』 10년 5월 11일).

경과

숙종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것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직후의 일이었다. 갑인(甲寅) 예송(禮訟)에서 남인을 지지했던 김석주(金錫冑)·김만기(金萬基) 등 척신 세력이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군사권 장악 음모가 노골화되자 숙종과 함께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것이 바로 경신환국이었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 세력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몰래 살피거나 역모 행위 등을 알리는 고변(告變) 등을 통한 정탐(偵探) 정치까지 동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의 언관들이 이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의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삼사에 포진한 소신 있는 젊은 관료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士林) 정치의 원칙인 공론(公論) 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다(『숙종보궐정오실록』 9년 윤6월 28일).

그런데 당시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이런 젊은 선비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 정치의 원칙을 저버리면서까지 훈척의 정탐 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숙종실록』 9년 3월 2일).

이로 인해 정국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683년(숙종 9) 박세채가 송시열과 함께 윤증의 출사를 요구하였는데, 윤증이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거부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 둘째는 척신의 전횡을 막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시열의 배타적인 태도를 제어하는 것이었다(『숙종실록』 9년 5월 5일). 이에 대해 박세채가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확인한 것은 송시열과의 협조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 해에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제출하였는데, 윤증이 지적한 삼대 명분은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안이었다(『숙종보궐정오실록』 9년 2월 4일). 당대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노·소론의 분열이 고착된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결국 탕평론에 대한 찬반에 의해 서인이 분열되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 이듬해 최신의 상소가 나와서 회니시비가 조정으로 비화된 것은 남인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소론 탕평론을 송시열 계열이 저지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윤선거의 강화도에서의 행적과 윤선거·윤증 부자의 윤휴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으면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공격한 것은 탕평론을 거부하는 논리로서 주자학 의리론이 원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숙종대뿐 아니라 영조·정조대에 회니시비가 문제가 된 것은 항상 탕평책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후대에 회니시비와 관련하여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절의를 잃었다,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 윤선거·윤증이 윤휴를 비호하였다 등의 개인적인 태도를 문제삼은 것은 전근대적인 의리론을 가지고 정치 쟁점을 치환하여 탕평책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탕평론은 양란기 이후 조선 왕조 국가가 처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모색하고 이를 정치의 중심 문제로 끌어들이려는 관료·선비 일각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 방향은 당시의 지배층이었던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약화 내지 제거하고 대동(大同)과 균역(均役)을 지향하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우리식 근대화는 그 연장선상에서 모색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탕평론과 반탕평론의 대립은 이 시기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노론측에서 회니시비를 제기하여 탕평책을 무력화시키려 시도한 것은 그 보수적 성격을 드러낸 것이었다. 즉 회니지쟁은 중세사회 해체기에 있었던 신구(新舊) 사상의 갈등을 반영한 다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당의통략(黨議通略)』
  • 『갑을록(甲乙錄)』
  • 『아아록(我我錄)』
  • 『후동문답(後洞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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