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준(畵樽)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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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화준 |
한글표제 | 화준 |
한자표제 | 畵樽 |
관련어 | 주준(酒樽), 철화백자호(鐵畵白瓷壺), 청화백자호(靑畫白瓷壺), 화룡준(畵龍樽), 화준(花樽)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방병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화준(畵樽)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0년 7월 22일, 『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3일 |
조선시대에 만든 청화백자 혹은 철화백자 항아리.
개설
조선시대에 사용된 왕실용 청화백자의 주요 기물인 화준(畵樽)은 ‘그림을 그려 넣은 항아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입호(立壺)와 둥그런 원호(圓壺) 등의 항아리가 제작되었는데, 용(龍)이 그려진 화준은 화룡준(畵龍樽)이라고 한다. 용도에 따라서는 꽃을 꽂는 화준(花樽)과 술을 담아두는 주준(酒樽)이 있었다. 17세기에 청화백자 생산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철화백자 용준(龍樽)을 대신 사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현재 전하는 청화백자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청화백자호(靑畫白瓷壺)이다. 청화백자호는 청화백자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대표적인 기종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조선 청화백자호를 살펴보는 것은 조선의 청화백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청화백자호의 문양으로는 매·난·국·죽의 사군자문(四君子文), 매화와 새를 그려 넣은 화조문(花鳥文), 연꽃·모란 등을 소재로 한 연화문, 모란문, 당초문,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운룡문, 산수문, 복을 기원하고 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수복문(壽福文), 십장생문(十長生文) 등이 있다.
조선전기에 성균관에서 사문(斯文) 모임에 화준 두 개를 설치하여 장식했다는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20년 7월 22일). 그 용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모임에서 대형의 청화백자호가 장식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떨어뜨려 깨뜨린 사람에게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보아 청화백자호를 매우 귀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청화백자호를 제작할 때 청화 안료를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15~17세기에는 청화백자호가 드물며 격이 높다. 실제로 널리 쓰인 것은 18~19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종류도 다양하다. 15~16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의 예로는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畵白磁弘治銘松竹文壺)와 호암미술관 소장인 청화백자매죽문호(靑畵白磁梅竹文壺)를 들 수 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의 예로는 청화백자풍죽문호(靑畵白磁風竹文壺),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인 청화백자난국문호(靑畵白磁蘭菊文壺)가 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의 예로는 청화백자산수문호(靑畵白磁山水文壺),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인 청화백자연로문호(靑畵白磁蓮蘆文壺) 등이 있다.
변천
15~16세기에 제작된 청화백자호는 몸체가 긴 형태의 입호와, 키가 낮고 몸체가 원형을 이루는 원호의 기형이 모두 있는데, 원호의 예는 극히 적고 의례용 기명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입호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는 양란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였고 대부분의 산업은 침제와 단절의 위기를 맞았다. 도자수공업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여 17세기에는 청화백자가 거의 제작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청화백자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산화철 안료를 사용한 철화백자호(鐵畵白瓷壺)가 유행하였다. 이렇듯 청화 안료가 부족했던 상황은 1617년(광해군 10)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왕실 연례(宴禮)에 사용할 화준이 없어 부득이 가화(假畵)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민망하여 중국 사신 행차를 따라가는 역관에게 중국에서 화룡준 한 쌍을 사오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3일). 임진왜란 이후 연향 등의 주요한 왕실 행사에 문양 자기인 화준이 부족한 상황에서 가화를 사용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가화용준은 당시 청화백자 제작을 위한 청화 안료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이를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초벌구이한 백자 위에 그림을 그려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에 들어 조선과 중국의 교류가 다시 활발해지면서 안료를 중국에서 수입하는 청화백자의 생산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7세기에 거의 생산되지 못했던 청화백자가 다시 제작되어 크게 유행하였고, 왕실뿐 아니라 문인 사대부 취향의 그릇도 다수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입호 형식의 백자 항아리 외에도 커다란 구형 항아리가 많이 제작되었다. 18세기에 백자를 제작한 대표적인 가마로는 전반기에는 금사리(金沙里) 가마, 1752년 이후에는 분원리(分院里) 가마를 들 수 있다. 특히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청화백자호들은 청초함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18세기부터 목이 직립되고 몸체가 팔각으로 각이 진 항아리가 만들어졌다. 문양은 여백 없이 꽉 차게 배치되었으며, 장생문 · 산수문 · 봉황문 등이 시문되었다. 특히 연향 때의 주준으로서나 화준으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2010.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윤용이, 『韓國陶瓷史硏究』, 문예출판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