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花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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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손으로 떼어 내어 꽃잎이나 대추를 위에 붙여 기름에 지진 떡.

개설

음력 3월 3일 삼짇날이나 9월 9일 중구절(重九節)에 만들어 먹는 시절음식이다. 삼짇날에는 진달래 꽃잎을 위에 올려 만들고, 중구절에는 국화 꽃잎을 위에 올려 만든다. 왕실에서는 정조 때 이후 3월 3일에 꽃구경과 화전놀이 그리고 활쏘기 놀이를 했다. 양반들은 이미 조선초기부터 화전놀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구절에도 국화 꽃잎으로 화전을 만들어 먹는 풍속이 있었다. 축하의 의미로 여러 가지 떡을 쌓고 제일 위에 웃기떡으로 올리기도 한다. 꽃잎이 없을 때는 대추로 꽃잎 모양을 만들어서 모양을 낸다.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밤알만큼씩 떼어 내어 둥글게 빚어 꽃봉오리 모양으로 빚은 떡도 화전이라고 불렀다.

만드는 법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서는 전화(煎花)라고 적었다. “두견화(杜鵑花: 진달래꽃)나 장미화(薔薇花: 장미꽃)나 출단화(黜壇花: 죽도화)나 찹쌀가루에 껍질을 벗긴[去皮] 메밀가루를 잠깐 넣고 꽃을 많이 넣어 눅게 만든다. 기름을 끓이고 적적 떠 놓아 자주자주 센 불에 지져서 한 김이 나가거든 꿀을 얹어 쓴다.”고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갈라 붙여 둥근 떡을 만든 다음 참기름에 지진다고 했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도 진달래꽃을 따다 찹쌀가루와 섞어 둥근 떡을 만든 다음 참기름에 지진다고 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중구절에 먹는 국화전 만드는 법이 있다. “냉수에 반죽하면 빛이 누르고 기름이 많이 드니 소금물을 끓여 더운 김에 반죽하여 가루를 쥐어 지져 풀어지지 않을 만치 하여 반반한 접시에 국화 형상으로 빚고 밤의 소를 넣어 족집게로 가는 주름을 잡아 쓰라. 두견·장미는 많이 넣어야 좋고 국화는 너무 많이 넣으면 쓰다. 국화 송이를 푸른 꼭지 없이 하고 가루 묻혀 지져도 좋다.”고 했다. 이 방법의 특징은 화전에 밤의 소가 들어간 점이다. 보통 소를 넣은 화전을 주악[造岳]이라고 불렀다. 찹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송편 빚듯이 해서 팥이나 밤 소를 꿀에 볶아 넣고 끓는 기름에 지진 떡이다. 왕실의 잔치음식에서는 화전을 주악의 한 종류로 분류하기도 했다.

이용기(李用基)가 1924년에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꽃전[花煎], 화전(花煎), 국화전(菊花煎), 두견전병(杜鵑煎餠), 주악[糙角餠] 등을 만드는 법이 나온다. 전병과 주악도 화전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중에서 꽃전은 찹쌀가루를 끓는 물에 반죽하여 작은 밤알만큼씩 떼어 내어 둥글게 빚어 가지고 손가락 끝으로 구멍을 파고 꿰어 들고 곁으로는 두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끄집어서 우들우들하여 마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만들어서 기름에 띄워 지진다고 했다.

연원 및 용도

『동국세시기』에서는 중국의 기름에 지진 떡인 한구(寒具)에서 그 연원을 찾았다. 그러나 답청(踏靑) 행사에서 나온 풍속으로 여겨진다. 당나라 이후에 유행한 답청절(踏靑節)은 본래 분명한 시기가 없었다. 당나라 이후 3월 3일인 상사일(上巳日)을 답청일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상사일에 수계(修禊)를 한다고 했다. 즉 물가에 가서 몸을 깨끗이 씻어야 나쁜 일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상사일을 수계일(修禊日)이라고도 불렀다.

위(魏)나라 때 3월 3일을 상사절(上巳節)로 고정하였다. 하지만 상사절과 청명절(淸明節)이 서로 가까워 이즈음에 답청을 하였다. 답청절은 평소와 달리 여성들에 대한 구속이 적은 날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양반 부인들이 산에 올라가서 화전놀이를 하면서 화전가(花煎歌)를 부르는 풍속이 생겼을 가능성이 많다.

『동국세시기』에서는 9월 9일 중구절에도 화전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노란 국화 꽃잎을 따다가 국화 찹쌀떡을 만드는데 그 방법은 3월 삼짇날의 진달래 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다고 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중구절의 화전놀이 연원을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궁녀 가패란(賈佩蘭)이 9일에 먹었다는 경단과 비슷한 ‘이(餌)’라는 떡으로 본다. 송나라 때의 세시기인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서는 “도시 사람들이 중구에 가루로 떡을 쪄서 서로 선물한다는 대목에서 국화전이 유래한 것으로도 생각했다.

왕실의 잔치에서 화전은 각색병(各色餠)이나 각색조악(各色造岳)의 구성물로 마련되었다. 정조대에는 선희궁(宣禧宮)에서 화전놀이를 하면서 왕이 7언절구로 시를 짓고는 군신들에게 화답하여 바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8년 3월 13일).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는 이 행사가 1791년(정조 15)에 행해진 이래 매년 실시되었다고 했다. 선비들도 2~3월에 꽃이 만발하면 정자에 모여서 화전놀이와 활쏘기를 하였다(『중종실록』 20년 3월 16일).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경상도 안동 지방에서는 부인들이 화전놀이를 하면서 화전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도잡지(京都雜誌)』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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