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火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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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지대에서 풀과 나무를 불태운 자리에 농사를 짓는 밭.

개설

화전 경작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지만, 그것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였다. 화전은 평지에 있는 평전(平田)에 비해서 유리한 조건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고, 그 결과 18세기에는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여기에 편승하여 지배층은 화전을 토지 축적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도 점차 화전에 대해서 나름의 정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내용은 일정 규모 이상의 화전 확대를 제한하고, 이미 경작이 이루어지는 화전에 대해서 낮은 세율로 수세하는 것이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후 전국의 농촌이 황폐해지면서 터전을 떠나 떠도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 대부분은 토지나 재산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국가가 부과하는 역(役)을 피하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화전을 개간하고 경작한 사람들은 1차적으로는 산간지대의 주민들이었지만, 이러한 유민들이야말로 화전이 크게 확대되는데 주요 노동력으로 역할을 하였다.

화전을 경작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점이 있었다. 경작자들이 과중한 국역을 피할 수 있었고, 화전에 대한 세금이 평전보다 낮았으며, 비교적 적은 비용과 노동력만으로도 손쉽게 개간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개간할 수 있는 땅을 구하는 일도 평전에 비하여 쉬웠다.

변천

화전은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궁방(宮房)·아문(衙門)·지방관청·세도가나 지방관 등이 화전의 개간·절수(折受)·겸병(兼倂)에 본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궁방이나 아문에서는 현(縣)이나 면(面) 단위로 화전을 절수·겸병하여서, 그 규모가 수백 결(結)에서 수천 결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세기에는 화전의 총 면적은 약 500,000~600,000결에 달하여 평전과 거의 비슷할 정도가 되었다.

한편 화전이 함부로 개간되면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무엇보다 산천이 황폐해져 수재(水災)의 원인이 되었고, 또 화전세(火田稅)를 지나치게 징수하여 민간에 또 다른 부담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이전부터 실시해 오던 화전 금지령을 강화하여 화전금단사목(火田禁斷事目)을 반포하였다. 정부는 화전 경작을 금지하는 장소를 정한 다음,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개간한 사람은 물론 해당 지역의 수령과 관찰사에게까지도 연대 책임을 물었다. 반면에 이미 개간된 화전은 토지 경장을 인정하고 화전 등록대장인 화전양안(火田量案)을 작성하였다. 이때 화전을 모두 6등전(六等田)으로 간주하고, 25일경(日耕)을 1결로 정하였다. 또한 화전양안을 작성할 때 자호(字號)를 배열하지 않고, 다만 지명(地名)만 기입하도록 해서 원전(元田)과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대에 이르러서는 화전의 세율(稅率)도 정해졌다. 도(道)에 따라 콩[太] 4말에서 밭벼[田米] 100말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원전에 비하여 세율이 낮았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수교집록(受敎輯錄)』
  • 『대전통편(大典通編)』
  • 『반계수록(磻溪隧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경세유표(經世遺表)』
  • 신호철, 「朝鮮後期 火田의 擴大에 대하여」, 『역사학보』 91, 역사학회, 1981.
  • 이경식, 「朝鮮後期의 火田農業과 收稅問題」, 『한국문화』 10,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9.
  • 이경식, 「朝鮮後期 王室·營衙門의 柴場私占과 火田經營」, 『동방학지』 77·78·79합집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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