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수지법(行守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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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제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관품이 관직보다 높은 경우 관직명 앞에 ‘행’을, 관품이 관직보다 낮은 경우 ‘수’를 부기하여 제수한 인사제도.

개설

국가의 운영에서 관료의 관품에 따른 관직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였으나, 상황에 따라서는 이 양자를 균형 있게 맞추는 것이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 보완하면서 관직을 원활하게 제수하기 위하여 행수법을 실시하였다. 관품이 관직보다 높은 경우 ‘행(行)’을 관품이 관직보다 낮은 경우 ‘수(守)’를 관직명 앞에 붙여 관품이 관직과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해결하였다. 행수법은 이미 고려에서 시행하였고,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사용하였다. 그러나 행수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세종대부터였다. 세종은 관료의 인사를 제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순자법(循資法)을 시행하였는데, 순자법으로 인하여 관료의 승진이 지연되어 관품과 관직을 맞추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문제를 행수법을 강화하여 보완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행수법은 이미 고려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조선초기에도 이어서 사용되었다. 1401년(태종 1) 문하부의 요청에 의하여 3·4품 무관의 행직은 본직을 상고하여 주의하는 법을 세웠다(『태종실록』 1년 3월 15일). 행수법의 시행은 1412년 사역원 등의 사직을 행직으로 겸차하게 한 것으로 거듭 확인되었다.

당시 행직제를 사용하였던 이유는 “행직의 설치는 쓸데없는 녹관(祿官)의 비용을 염려하여 임시로 설치한 비용을 줄이는 법”이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때 시행된 것은 행직제에 한정되었으며, 수직제는 도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은 1442년(세종 24)에 행수직제를 강화하여 시행하였다. 세종은 “옛날 선대의 행직·수직의 제도를 본받아 혹은 낮은 관품으로 높은 관품의 직무를 수직하게 하고, 혹은 높은 관품으로 관품이 낮은 직무를 행직하게 하려고 한다.” 하여 행수직제의 시행을 강조하였다. 세종은 행수직을 시행하는 이유로 외관(外官)은 만 30개월을 기다려야 한 자급이 오르는 데 비하여, 경관(京官)은 근무 일수를 채우지 않고 자급이 오르거나 품계를 뛰어넘어 승진되는 자가 매우 많다는 것을 들었다(『세종실록』 24년 7월 7일). 즉, 중앙 관원의 빠른 승진을 지방 관원과 맞추기 위해서 행수법을 시행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이미 세종은 순자법을 강조하여 특히 지방 수령을 중심으로 순자법이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중앙의 관료들도 순자법의 제한을 받고 있었지만, 각 부서 내에서 순차적으로 승진하는 관행에 따라 윗자리가 비게 되면 아래의 관원들이 승진 기간이 차지 않아도 윗자리로 이동하면서 윗자리에 해당하는 관품을 받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은 순자법에 입각한 관료 승진의 방식을 완성하기 위해서 행수직법을 강조하였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이미 행직법은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수직법이 강조된 것이었다. 이후 1443년에는 경관에게만 시행하던 행수법을 보완하여 지방 수령에까지 적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행수법이 완성되었다.

내용

행수법이 만들어지면서 이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되었다. 1443년 대신들은 행수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본조의 제도는 연령이 만 20세가 되어야 비로소 벼슬하는 것을 허가하므로 문과나 무과에 출신한 자는 모두 30세 이상입니다. 이제 행수로서 개월을 따져 승자하는 법을 보면, 무릇 벼슬길에 들어온 자가 임시 권무부터 반드시 사고 없이 만 40∼50년의 임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3·4품의 자급에 오르게 되는데, 벼슬하는 동안에 사고 없이 50여 년을 넘기는 자는 거의 없거나, 겨우 있는 정도입니다. 하물며 나이 40이면 노쇠하기 시작하는데, 50여 년을 지난다면 쇠하거나 병들지 않고 직무를 감당할 자는 드물 것입니다.” 하여 행수법을 엄격하게 시행할 경우 관료의 승진이 적체되어 적절한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서 세종은 “당초에 행수의 법을 세울 때 이런 폐단이 있을 줄을 내가 몰랐던 것은 아니나, 다만 행수의 법을 세우면 집정자가 마음대로 올리고 내리고 하는 권한이 없어지고, 등용되는 사람도 또한 요행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이 없어질 것이기에 내가 이 법을 세웠던 것이다.” 하여 행수법의 시행 이유를 인사권자의 인사 전행(專行)을 막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세종은 행수법의 보완책으로 참외(參外)는 15개월, 5·6품은 20개월, 3·4품은 30개월 만에 의례히 한 계급씩 가자(加資)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세종실록』 25년 6월 22일).

이후로도 행수법의 문제점은 계속 지적되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만들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문종대에도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낭관 그리고 대간의 인사는 별도로 하여서 ‘순자(循資)와 용현(用賢)’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안이 제안되었다.

성종대에 이르면 상황이 바뀌었다. 이전의 행수직에 대한 문제점이 수직제에 대한 것이었다면, 성종 이후로는 행직제에 대한 문제로 바뀌었다. 세조대에 과도한 공신의 배출과 대가(代加)제도의 적극적인 시행으로 오히려 고위직이 과다하게 생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위 관직자가 넘쳐 대신들은 이제 당상관이 거의 300명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2품을 가지고도 종9품의 부사용(副司勇)이 된 자까지 있다고 하여 과도한 행직제의 시행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안으로 행직으로 임명하는 관직의 하한을 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2품 이상은 3품을 내리지 말고, 3품 당상은 4품을 내리지 말자고 제안한 것이 그 예였다(『성종실록』 8년 7월 17일).

변천

행직과 수직에 대한 문제점이 제시되고 그 개선안을 제안하며 행직제가 수정되었으나, 행직제와 수직제를 통하여 관품과 관직을 조절하는 방식은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시행되었다. 다만 그때그때 시행의 관행을 더하여 가면서 가다듬어졌다. 인조대에 대사간의 경우 행직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한 지적은 대사간이 행직으로 임명되는 관행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숙종대에 중추부 외에는 일찍이 2자급을 내려 행직으로 삼는 예가 없었다는 지적은 행직의 경우 2자급 이상을 내려서 임명하지 않는 관행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숙종실록』 12년 12월 11일).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한충희, 「조선 세조~성종대의 가자남발에 대하여」, 『(계명대) 한국학논집』 12,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