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循資)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인에게 일정 기간 근무한 것을 평가하여 품계를 올려 주는 인사 방식.

개설

관료들은 일정 기간 근무하면 평가를 받고 평가에 일정 이상의 성적을 얻으면 품계를 높여 승진할 수 있었다. 조선의 관료들은 3년을 기준으로 6개월마다 평가를 받고 5번 평가받은 것 중에서 3번 이상 ‘상(上)’의 성적을 얻어야 품계를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일정 기간의 근무를 통해서 얻은 것을 ‘자(資)’ 혹은 ‘자격(資格)’이라고 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인사하는 방법이 순자격(循資格) 또는 순자법이었다. 이와 대비되는 인사 방법은 탁용법(擢用法)으로 특별한 능력을 인정하여 일정 기간의 평가를 거치지 않고 승진시켜 주는 방식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순자법은 고려부터 시행하던 제도로 관료를 승진시킬 때 인사 담당자들의 사적 관여를 막고 제도에 의하여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

내용

순자법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1394년(태조 3)부터 순자법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순자법이 시행되면서 일정한 임기를 채우지 않고 특진되는 탁용의 법은 규제되었다. 1394년 대사헌박경은 관직이 공기(公器)이기 때문에 관료를 임명할 때에는 마땅히 덕망을 먼저 보아야 하고 함부로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국가에서 고려의 옛 제도에 의하여 순자의 법을 쓰고 있는데, 진실로 재질과 덕망이 출중하지 않으면 계급을 뛰어 올릴 이치가 없다고 언급하였다(『태조실록』 3년 12월 26일). 이를 통하여 탁용이 규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자법이 시행되면서 관료의 인사는 연말이 되면 도목장(都目狀)을 받아서 순자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규정화되었다.

순자법의 엄격한 시행을 강조한 것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인사를 담당하는 대신들의 사적 관여를 막고자 하였고, 순자법에 입각한 제도를 바탕으로 한 인사를 강조하였다. 1430년(세종 12) 세종은 우리나라의 제도에 30개월이면 관리의 계급을 올려 주는 것이 규례로 정해져 있으니, 마땅히 계급을 따라서 승진시키고 차례를 건너뛰지 못하게 하라고 순자법의 준수를 강조하였다(『세종실록』 12년 윤12월 27일).

세종은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당상관 자의가 아니라 제도에 근거하여 인사가 행해지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순자법의 시행을 강조하였다. 순자법을 강조하면 관료들의 승진은 늦어지고 따라서 필요한 관직의 품계에 적당한 관원이 부족할 수도 있었다. 세종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행수법(行守法)의 시행까지 강화하여 시행하면서 순자법에 의한 인사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변천

세종대에 순자법이 강력하게 시행되면서 이에 대한 관료들의 반발도 상당하였다. 순자법을 강조하면서 순자법의 문제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순자법의 문제는 순자법에 의하여 관료들이 승진을 하는 경우에 승진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적절한 인재를 적절한 시기에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특별한 인재의 사용에 순자법은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하여 세종은 “만일 쓸 만한 인재가 있을 때에는 승진하는 차례를 무시하고 발탁하여 채용하기로 함이 어떠한가.” 하여 특별한 인재는 순자에 의하지 않고 탁용할 수 있는 여지도 열어 놓았다(『세종실록』 12년 윤12월 27일).

순자법에 대한 개선의 필요성은 세종 후반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순자법의 문제점은 관료들이 승진하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이조에서는 “동서반 4품 이하에서 정·종 두 급은 각각 한 계자씩 줄이거나 혹은 개월의 수를 반으로 줄여 가자(加資)”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세종은 1443년(세종 25)에 “만약 이 법을 시행하여 구애되는 것이 있으면 참외(參外)는 15개월, 5·6품은 20개월, 3·4품은 30개월 만에 당연히 1계급씩 가자시켜서 통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여 개선안도 제안하였으나 분명한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계속해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종대에도 도승지이계전은 지금 순자법으로 인하여 현명한 사람과 우매한 사람이 같이 침체하게 된다고 순자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인재를 임용할 때는 순자의 법만 지킬 수는 없으니 순자법을 따르지 않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서 문종도 어질고도 재간 있는 사람이 임용된다면 백성이 편안할 수가 있는데, 유사에서 순자의 법만 굳이 지킨다면 어진 사람이 있더라도 침체함을 면치 못하게 된다고 인정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8일). 이처럼 문종은 순자법의 문제점에 동의의 뜻을 표하였으나, 제도적으로 순자법을 폐하지는 않았다.

조선에서 왕과 관료들은 순자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순자법의 순기능 역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순자법을 인정한 위에서 관행적으로 몇몇 특정 부서에 한하여 순자법을 적용하지 않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주로 청요직(淸要職)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그 한 예로 1450년(문종 즉위년) 남지는 ‘의정부·육조(六曹)의 낭청과 대간의 거관법’을 제시하면서 청요직에만 순자법을 적용하지 않으면 현인을 등용하는 길을 열 수가 있으니, 이같이 된다면 순자와 용현의 두 가지가 다 같이 시행되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26일).

조선중기에도 순자법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논의되었는데, 그중 한 가지로 제시된 것이 천거제(薦擧制)와 현량과(賢良科)였다. 중종대 기묘명인들은 천거제를 강조하면서 인물에는 차등이 있는 것이니, 순서를 뛰어넘어 써야 할 사람이 있고 순서를 따라 쓸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하여 천거제와 현량과를 순자법의 한계 보완책으로 주장하였다(『중종실록』 13년 5월 12일).

순자법의 문제점은 왕과 관원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 문제점을 제한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면서, 순자법은 가장 중심이 되는 인사 방식으로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한충희, 「조선 세조~성종대의 가자 남발에 대하여」, 『한국학논집』 12,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