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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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고종 30) 1월 경기도 연안 등 연해 요충지를 방비하기 위해 설치한 군영.

개설

해연총제영은 1893년(고종 30) 1월 경기 연안 등지의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으며, 수군 육성과 자주적 해방을 희망한 고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경복궁 점령 사건 직후인 1894년 6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기 연안 등지의 해안 방어를 담당했던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이 1888년 폐지된 후 해안 방어가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이에 고종은 연해(沿海) 요충지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1893년 1월 26일 청주에 있던 통어영(統禦營)을 남양부(南陽府)로 옮기고, 그 수장을 해연총제사(海沿摠制使)로 부르도록 하였다.

다음 날인 1월 27일 최고의 권력 실세였던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민응식(閔應植)을 해연도총제사(海沿都總制使)에 임명하였다. 이로써 해연총제영은 해안 방어를 위한 군영으로 출범하였다. 이때 고종이 해연총제영을 설치한 배경에는 기연해방영이 폐지되어 공백 상태에 있던 수군을 정비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고, 또 연해 방위를 청나라 북양해군(北洋海軍)이 장악하고 있던 현실을 타파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조직 및 역할

해연총제영은 자주적으로 해안을 방위하려는 고종의 의지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동학농민전쟁이 격화되면서 미처 조직과 체제를 완비하지 못했다.

1893년 4월에는 인천을 해연총제영에 소속시키고 군사 120명도 편입시켰으며, 9월에는 남양 대부도(大阜島)에 수사별장(水師別將)을 증설하고, 10월에는 통어영에서 관할하던 각 관방(官房)의 면세전(免稅田)도 총제영으로 옮겨 재정 수요에 충당토록 하였다(『고종실록』 30년 4월 12일) (『고종실록』 30년 9월 8일) (『고종실록』 30년 10월 1일).

해군총제영은 1893년 소속 군인 300여 명을 수원부에 파견했다가 다시 강화 본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변천

1893년 2월 7일 내무부(內務府)는 해연총제영의 제치절목(制置節目)을 올리면서 종전 기연해방영에서 관할하던 통진(通津)·풍덕(豐德)·영종(永宗)·장봉(長峯)에 있는 둔전답(屯田畓)을 모두 해연총제영에 이속시켜 군사상 필요한 것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0년 2월 7일).

이때 해연총제영의 지위를 1품 아문(衙門)으로 했는데, 이는 해연총제영을 한낱 군영이 아니라 전국 해군을 관할하게 하려는 속뜻이 반영된 것이다. 이어 3월에는 해연총제사로 하여금 강화유수와 진무사(鎭撫使)를 겸임하도록 했다.

1893년 11월에는 독판내무부사를 겸했던 해연총제사민응식(閔應植)이 적임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교체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고종은 계속 직임을 맡기면서 “지금은 초창기이나 오래 지나면 가닥이 잡힐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때도 조직과 체계가 완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연총제영은 일제의 경복궁 점령 사건 직후인 1894년 6월 22일 폐지되었다. 조선의 군영 가운데 가장 먼저 폐지 대상이 되었으며, 이후 해군 지휘권은 강화영에 이관하도록 했다가 6월 28일 관제 개혁 때 군무아문 산하 해군국으로 넘어갔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 최병옥, 『개화기의 군사정책연구』, 경인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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