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전(閑山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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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주력함대를 크게 격파한 해전(海戰).

개설

한산전은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선조 25)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연합함대를 결성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를 학익진(鶴翼陣)으로 대파했던 전투를 지칭한다. 한산전은 한산대첩 또는 한산도대첩으로 부르기도 하며,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도 꼽힌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일본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조선의 내륙으로 진격했다. 왜군은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시켰고 순식간에 한양까지 진격했다. 왜군은 전쟁 초기부터 수륙병진 계획으로 조선 전토를 제압하고자 했다.

경상도의 수군은 일본군 함대와 전투도 하기 전에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보유하고 있던 함포와 병선들을 스스로 바다에 침몰시켜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1만에 달하는 군사 역시 해산시켜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우수사원균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과 군기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면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하지만 이운룡은 원균에게 항거하여 방어의 필요성과 호남의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에 원균도 율포만호(栗浦萬戶)이영남(李英男)을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틈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라고 했다. 그런데 녹도만호(鹿島萬戶)정운(鄭運)과 군관송희립(宋希立)만이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했다. 이들은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으며,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순신은 크게 기뻐하고 출동을 결정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거칠 것 없이 진격하던 일본 수군은 남해와 서해로 침범해서 조선의 제해권까지 장악하고자 했다. 이때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함대와 상대하게 되었다.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해전을 통해 일본 수군을 완벽하게 격파했다.

옥포해전은 이순신 함대와 일본 수군의 임진왜란 당시 첫 번째 전투였다. 이순신 함대는 1592년 5월 4일 새벽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에서 판옥선(板屋船) 24척과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5월 7일 옥포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순신은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순신 함대의 활약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순신이 본영에서 사량(蛇梁)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層樓)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고, 마침내 엄습(掩襲)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전라우수사이억기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船樓) 위의 적장을 쏘아 죽이고 그의 수급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붙여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했다. 또 영등포(永登浦)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조선 수군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이순신 함대는 계속 출전해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 6월 5일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승전했고 적선 72척을 침몰시켰다. 이순신은 계속된 승리로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이순신 함대의 활약으로 일본 수군은 조선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작전에 실패했음은 물론 전체적인 작전 계획 자체를 변경해야만 했다. 아울러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이순신 함대를 제압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을 수립했고, 이순신 함대 역시 일본 수군의 움직임을 분쇄해야 했다.

발단

해전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일본군은 결국 거제도 일대로 진출해 조선 수군을 공략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결국 일본 수군의 명장이었던 협판안치(脇坂安治,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의 전선을 인솔하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아울러 구귀가륭(九鬼嘉隆, [구키 요시타카])도 42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협판안치의 함대를 뒤따랐다.

이러한 일본 수군의 동향을 탐지한 조선 수군도 1592년 7월 6일 전라좌수사이순신이 전라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이끌고 노량에 이르렀고, 경상우수사원균이 7척의 배를 이끌고 합류했다. 7월 7일 적 함대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이순신은 7월 8일 아침 견내량으로 진공했다.

그런데 견내량은 지세가 포구는 좁고 암초들이 많아 함대에 판옥선을 많이 가졌던 조선 수군에게 불리했으며, 일본 수군에게는 위급하면 육지로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지형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견내량에서부터 유인해서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앞서 경상우수사원균은 일본 함대가 견내량을 뒤덮어 오는 것을 보고 승리를 자신하며 곧장 대적하려고 했다. 이에 이순신은 항구가 좁고 얕아 함선으로 작전할 수 없으니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원균이 말을 듣지 않자, 이순신은 병법을 모른다며 원균을 꾸짖었다. 여러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물러나는 척하니, 일본군이 과연 기세를 올리면서 조선 수군을 추격해왔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이순신 함대는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일본 수군이 반격하면서 추격해 오자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물러나면서 유인해서 넓은 지역에 전장을 형성했다. 유인되어 한산도 앞바다까지 끌려나온 일본 수군에 대한 공격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전 함대를 반전시켜 학익진을 전개하고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자총통(地字銃筒)과 현자총통(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격했다. 전투의 결과 중위장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하였으며 무수한 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경과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산전에 대한 경과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砲焰)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했다.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했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일본 수군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진(倭陳)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천 명이다.’고 하였다. 이 일을 아뢰자 순신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자계(資階)를 상으로 내리고 글을 내려 칭찬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한산전의 결과와 이순신 함대의 전공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수군장수 협판안치는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방향으로 간신히 도주하였다. 또 한산도로 도주한 왜병 400여 명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한산전은 조선 수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조선 수군은 이 전투의 대승으로 일본 수군의 주력을 붕괴시켜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남해안과 서해안으로 진출할 방법을 잃은 일본 수군은 해로를 통한 수륙병진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육군에게 식량도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등 병참선 확보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겨 일본 육군의 활동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 아울러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에게 계속 불리했던 전세를 전환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산도대첩은 진주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또한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도 불린다.

참고문헌

  • 『난중일기(亂中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姜興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문운당, 1948.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壬辰倭亂史』, 民族戰亂史, 1987.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 鄭鎭述, 「閑山島海戰 硏究」, 『壬亂水軍활동연구논총』, 해군군사연구실,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