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궁(豐壤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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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태종이 말년에 건립한 이궁.

개설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한 후 한양 동쪽에 풍양궁, 남쪽 동교대산(東郊臺山)에 낙천정(樂天亭), 서쪽에 연희궁(衍禧宮)을 지어 번갈아 거처하였다.

위치 및 용도

태종은 흉한 일을 피하기 위해 몇 개의 건물을 지었는데, 풍양궁 역시 그러한 목적으로 경기도양주목 풍양현 동쪽에 지은 이궁(離宮)이다.

변천 및 현황

태종은 1418년(태종 18) 세종에게 선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1419년(세종 즉위) 11월 23일 태종은 낙천정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부엉이[鵂鶹]가 나타나서 우는 것을 목격하였다. 태종은 『운회(韻會)』에서 ‘유(鶹)’ 자를 풀이하기를, ‘유’는 새 이름인데, 울면 흉하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떠올렸다. 이에 부엉이가 우는 것은 흉(凶)을 상징하는 것이니 흉한 방향을 피해 거처를 옮겨 다니기로 결정하였다. 흉한 것을 피해 거처를 옮기는 것을 피방(避方)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태종은 이미 건립한 낙천정에 더해 포천과 풍양에 이궁을 지을 것을 지시하였다(『세종실록』 1년 11월 23일). 그리고 다음 날 포천과 풍양으로 이동해 이궁을 지을 터를 직접 살펴보았다. 이궁을 지을 재목은 천보산에서 벌채했는데, 방패보충군(防牌補充軍)과 당령선군(當領船軍)을 이용했다(『세종실록』 1년 12월 14일).

풍양궁을 건설하던 중 태종은 포천과 풍양이 모두 동쪽에 있어서 서쪽에는 피방할 궁이 없으니 무악(毋嶽)에도 이궁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무악의 이궁은 후에 연희궁이라고 했다. 이로써 피방할 곳으로 남쪽에는 낙천정, 동쪽에는 풍양궁을 짓고 서쪽에는 무악에 궁을 지어 때에 따라 옮겨가면서 액운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후 태종은 낙천정과 풍양궁을 오가며 거처했고, 무악에서 머문 경우는 드물었다.

낙천정은 1419년(세종 1) 2월에 만들어졌다. 낙천정과 관련해서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낙천정기(樂天亭記)」가 전한다(『세종실록』 1년 9월 4일). 「낙천정기」에 의하면 태종이 바람을 피해 언덕의 간방(艮方) 모퉁이에 이궁을 짓도록 했고, 언덕 위에 정자를 짓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 좌의정박은(朴訔)에게 정자 이름을 짓도록 하였고, 박은이 『주역』「계사(繫辭)」에서 ‘낙천(樂天)’ 두 자를 따서 올렸다. 낙천은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하늘을 즐기고 명을 알면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이 「낙천정기」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권홍(權弘)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고 한다.

풍양궁에는 수각이 마련되어 있었다. 태종은 이궁 서편에서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고 돌로 축대를 쌓아 그 가운데에 정자를 지었는데, 가장 청아하고 상쾌한 곳이었다고 전한다.

세종대에는 풍양궁과 낙천정의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태종 사후에도 풍양궁과 낙천정을 보존하기 위해 풍양궁에는 수직으로 내시(內侍), 다방(茶房), 별감(別監)을 각 2명으로 하고 낙천정의 수직으로는 내시, 다방, 별감을 각 10명으로 해서 서로 번갈아 당직을 서게 했다. 1441년(세종 23)에는 “풍양궁, 낙천정, 연희궁 등 각처에는 선공판사(繕工判事) 이하가 나누어 맡아서 완전히 갖추어진 여부를 고찰하고 해유(解由)에 갖춰 기록하여, 만일 쓰러지는 것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유사로 하여금 추핵(推劾)하게 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23년 윤11월 11일).

이궁의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허술하게 진행된 듯하다. 낙천정에 대해서 1450년(문종 즉위)에는 “정자와 궁전(宮殿)이 비가 새고 또 기울어지고, 헌함(軒檻)이 모두 파괴되어 먼지와 흙이 벽에 가득 차고 국희(鞠戲)하던 곳은 잡초가 무성하게 되고, 또 그 정기(亭記)의 판(板)은 썩어빠지고 글자는 흐려졌습니다. (중략) 파괴하지도 않고 수리하지도 않아서 저절로 무너지는 것이 옳겠습니까?”라는 내용이 발견된다. 이에 문종은 낙천정을 수리하도록 조치하였다[『문종실록』 즉위 10월 10일 7번째기사]. 풍양궁의 경우도 1459년(세조 5)에 수리가 진행되었다. 중종대에도 풍양궁과 낙천정의 수리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풍양궁은 별다른 수리 없이 사용되었다. 풍양궁은 중종대까지 중요하게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후에는 역사적 사료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96년(숙종 22) 명혜공주방(明惠公主房)의 궁인(宮人)이 풍양궁 터에서 이틀 동안 소를 잡고 제수를 마련하여 신사(神祀)를 베풀었다. 그런데 궁터에서 무당이 제사를 지낸 것과 기근으로 죽은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재물을 낭비하였다는 비난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도 풍양궁 터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숙종실록』 22년 1월 15일).

참고문헌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