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첨포(逋上添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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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포상첨포 |
한글표제 | 포상첨포 |
한자표제 | 逋上添逋 |
상위어 | 포흠(逋欠) |
관련어 | 환곡(還穀), 모조(耗條)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송찬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포상첨포(逋上添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22년 3월 10일 |
환곡 등을 갚지 않아 생긴 포흠에 이자가 붙어 늘어나는 것.
개설
환곡에는 이자가 붙기 때문에 환곡에 포흠(逋欠)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 적발하여 조치하지 못하면 해마다 그 이자를 물어야 했다. 포상첨포라는 말은 포흠의 액수가 복리의 형태로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환곡의 포흠이 급격히 늘어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2년 3월 10일).
내용 및 특징
포상첨포는 환곡 등 재정의 포흠이 늘어나는 폐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포흠 위에 다시 포흠이 첨가된다는 뜻을 지녔다. 포흠이 처음 생겼을 때 조치하지 못하면 해마다 환곡의 이자인 모조(耗條)까지 포함하여 복리로 계산되기 때문에 ‘포상첨포’가 되었다.
따라서 포흠 발생을 억제하고 또 포흠을 일찍 적발하기 위하여 수령이 교체될 때마다 감사는 조사관을 파견하여 신임 수령과 함께 창고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창고 조사를 부실하게 한 수령에 대해서는 법전에 따라 처벌하고 감사에 대해서도 연대 책임을 물었다. 포흠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수령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다스리는 읍에서 포흠 사실이 드러나면 은폐한 책임을 물어 처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이미 이러한 정도의 제도로는 포흠을 규제하기 어려웠다. 포흠을 발생시키는 중심 집단이었던 서리층은 환곡의 복잡한 구조를 이용하여 포흠을 늘려 갔다. 장부상으로 다른 명목으로 분록(分錄)한다든가 장부를 위조하여 증거를 없애 환포를 감추었기 때문에 그들의 포흠은 좀처럼 발각되지 않았다. 더구나 수령 또한 서리와 결탁하여 포흠의 이득을 함께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포흠은 규제되지 않으면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 환곡은 철저히 고리대적 형태로 운영되었으므로 포흠을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이자가 붙어서 이른바 포상첨포의 현상으로 늘어나기 일쑤였다. 실제로 1862년(철종 13) 경상도 진주목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었던 박규수(朴珪壽)가 진주의 이무곡(移貿穀)에 대하여 조사한 것을 보면 포흠은 “원곡×(1+0.1)X(X는 포흠된 햇수)” 방식으로 계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송찬섭,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