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발군(擺撥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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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파발군 |
한글표제 | 파발군 |
한자표제 | 擺撥軍 |
관련어 | 발참(撥站), 발장(撥將), 발군(撥軍), 잡색군(雜色軍), 궤군(潰軍), 노잔군(老殘軍), 방군(防軍), 속오군(束伍軍), 정초군(精抄軍), 장무대(壯武隊), 관군(官軍), 무학군(武學軍), 유청군(有廳軍) |
분야 | 경제/교통/마정 |
유형 | 직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남상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파발군(擺撥軍) |
발참에서 발장(撥將)과 발군(撥軍)으로 조직된 구성원.
개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기존의 통신 제도인 봉수제(烽燧制)와 역전제(驛傳制)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새로이 파발제를 도입하였다. 그에 따라 전국에 약 205개의 발참(撥站)을 설치하였는데, 파발군(擺撥軍)은 발참에 소속되어 변방의 군사 정보 및 국내외의 긴급 문서를 신속히 전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파발 제도는 1597년(선조 30) 5월에 집의(執義)한준겸(韓浚謙)이 명나라의 예에 의거해, 파발을 설치하여 변경의 문서를 전달하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성립하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 등 3개 노선을 두었으며, 전송 수단에 따라 기발(騎撥)과 보발(步撥)로 구분하였다. 기발은 25리마다 참(站)을 두고, 참마다 발장 1명, 색리(色吏) 1명, 군졸 5명, 파발마 5필을 두었으며, 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고, 참마다 발장 1명, 군졸 2명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동지지(大東地志)』「정리고(程里考)」 발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병고(兵考)」 발참,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발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발군은 발장과 발군으로 구성되었다. 발장은 휘하의 발군을 지휘 감독하면서, 변방의 군사 정보 및 국내외의 긴급 문서를 신속히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 까닭에 대개 글을 알고 성실하며 무술을 갖춘 자가 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때로는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무뢰배를 임명하여, 파발이 문란해지고 심지어는 문서를 유실하는 등의 문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1704년(숙종 30)에는 이조 판서이유(李濡)의 건의에 따라, 그 지역 출신의 글을 아는 자를 임명하여 직첩을 만들어 주고 삭료(朔料)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권관(權管)의 예에 따라 근무 일수 50삭(朔)이 차면 정6품 사과(司果)로 승진하게 하였다. 하지만 파발이 지체되거나 혹은 공문서를 훔쳐보거나 분실하는 등의 사고가 나면 처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므로,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군은 양인 출신의 정병(正兵) 가운데 젊고 민첩하며, 말을 잘 몰고 무예를 갖춘 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 등 거듭된 전란을 거치면서 잡색군(雜色軍), 궤군(潰軍), 노잔군(老殘軍), 방군(防軍), 속오군(束伍軍), 정초군(精抄軍), 장무대(壯武隊), 관군(官軍), 무학군(武學軍), 유청군(有廳軍)등이 발군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잡색군은 유사시에 동원하기 위해 설치한 예비군이며, 궤군은 병자호란 때 패한 군인이었다. 그리고 방군은 평안도 등에 배치한 방어군이었으며, 속오군은 1594년(선조 27) 전후에 양인과 공사(公私)의 천인으로 구성한 지방군, 정초군은 보병, 장무대는 기병이었다.
정유재란 때는 서로(西路)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방군을 파발군으로 임명한 까닭에 변방의 정보가 지체되는 일이 없었는데, 광해군 때는 파발군을 각 읍에서 배치하면서 변경의 소식이 지체되는 일이 생겨났다. 그에 따라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1623년(인조 1) 4월, 도원수장면(張晩)의 건의에 따라 "예전대로 말을 가진 방군(防軍)을 파발군에 임명"[ 『인조실록』 1년 4월 24일 1번째기사]하였다.
한편 파발군으로 배치된 정초군, 장무대, 방군 등은 과중한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을 견디지 못하고 유리 도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안도 정초군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들은 파발군에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군위군(軍威軍)에 보충되고, 소재 관아의 신역을 서는 등 세 가지 역(役)을 겸하였다. 더욱이 해마다 번상포(番上布) 2필을 바쳐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하는 사람이 열에 한두명이 넘어 파발을 운영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1652년(효종 3)에는 이조 좌랑조한영(曺漢英)이 번상포를 감면해 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신들의 협조를 얻지 못해 무산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남도영, 『韓國馬政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1997.
- 남상호, 「조선시대 파발제-군사통신제 발달」, 『韓國軍事史 13』, 경인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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